한줄 詩

먼 곳 - 정진혁

마루안 2020. 8. 1. 19:09

 

 

먼 곳 - 정진혁


잘 늙은 마루에 누우면 먼 파도가
몸 어딘가에 모르는 저녁을 두고 갔다

저 너머 장재도에 노란 원추리가 흔들려 갑자기 오후 6시가 사라졌다
유자가 파랗게 매달려 익어 가는 수요일이다

등 굽은 할매가 저녁을 차리는 민박집 뒤뜰
고요만큼 빨랫줄이 흔들리고 냄비는 달그락달그락 끓어넘친다

말라 가는 생선의 눈을 본다 문득 전생이 멀다

바람이 분다 배롱나무 붉은 너울이 친다
마당을 지나는 슬리퍼 소리가 어둠을 끌고 간다

모기향을 피우면서 달력을 본다
입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

눅눅한 노트에 뭔가를 적어 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벽에 등을 기대는 사이 여름의 끝이 보였다

알전구를 껐다
물방울 같은 귀뚜라미가 밤새 저 너머를 울어 준다

내용도 없이 눈물이 난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바톤 - 정진혁 


사십이 오십에게 넘겨준 바톤
호흡이 잠시 맞지 않았고 삐끗했다
빨간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오십이 시큼했다
바람바람바람
다만 어딘가로 뛰어가고 싶었다

아주 먼 곳을 달리다가 아침이면 늘 같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
모든 방은 하나의 트랙이어서 밤새 달리고 달렸다

때로 바톤을 떨어뜨려 주춤거리고
머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머리를 물고 돌고 돌았다

어디서 나는 시작되는가?

눈을 뜨면 바톤이 넘겨준 몇 개의 단어가
머리맡에 빠진 머리카락처럼 흩어져 있었다

바톤 속에 몇 십 년이 지난 기억들이 재어져 있다
어떤 물음 하나가 운동장처럼 텅 비어 있었다
오십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지점인 것 같다

모든 아련한 것들이 바톤을 건넨다
해변의 냄새를 안고 바톤은 달린다
4월의 회색 스웨터를 입고 달린다

바톤은 생을 어느 다른 곳으로 데려가지는 않았다
그저 넘겨줄 뿐 돌고 돈다

바람이 달린다
산 하나가 달린다
아카시아 향기가 달린다
맥주잔을 들고 치킨이 달린다
바톤을 손에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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