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아빠의 아빠가 됐다 - 조기현

마루안 2020. 8. 7. 19:52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 또는 핏줄이 땡긴다, 등 가족이라는 끈을 강조하는 문구를 인용한다. 맞다. 어릴 때 헤어진 부모나 형제를 성인이 되어 못 알아보는 것은 연속극에서나 보는 일이고 대부분 닮은 꼴을 떠나 저절로 핏줄이 땡겨서 알아 본다.

 

둘 다 아기 때 헤어졌다면 혹 모를까 곧 데리러 오겠다며 떠난 오빠를 훗날 여동생이 못 알아 보는 연속극 설정은 유치하다. 그런 것을 울궈먹는 작가의 상상력도 대단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몇 마디 나눠보면 금방 핏줄임을 알 수 있는 끌림은 인간의 유전자다.

 

그런 가족이 때론 짐이 되거나 혹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낳아 준 것밖에 없는 아버지를 병간호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다. 넋두리가 아닌 가족이라는 끈을 끊지 못해 병든 아버지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의 생생함이 가슴 뻐근하게 다가온다.

 

저자 조기현은 공돌이와 노가다를 거쳐,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50대 아빠의 아빠로 살아가는 1992년 생 청년 보호자다.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여동생은 엄마를 따라 갔고 저자는 아빠와 살았다.

 

아버지 또한 미장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다. 생활고에 시달린 부자는 서로에게 관심을 보일 만큼 여유롭지 않은 환경의 가족이다. 고교를 마친 저자가 막 스무 살이 될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고 119 차에 실려 가면서 고난은 시작된다.

 

중환자실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보증이 필요한데 만 24살이 안 되어 보증을 설 수 없다. 의식이 없는 아버지를 두고 저자는 보증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데 자격이 안 되거나 거절하거나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따라왔던 노가다 동료 김 씨 아저씨가 구세주다. 병원비가 많이 나오면 어떻게 갚을 거냐는 김 씨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저자, 그러나 김 씨는 "연대 보증란"에 인적사항을 적는다.

 

뙤약볕에서 일했던 노가다 아버지는 새까만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다. 입에 호흡기를 물고, 코에 영양제를 주입하고, 요도에 소변 줄을 끼고, 파르르 눈썹을 떨면서 흰자위를 드러낸다. 한 고비 넘기자 간호사가 병원비를 수납하라고 한다.

 

통장에 있는 얼마의 돈으로는 턱도 없다. 아버지 형제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나온 작은 아빠도, 이혼한 엄마도, 고모부도 돈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딱하게 여긴 병원에서 사회복지과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긴급 복지 지원도 해당이 없고,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도 거절당한다.

 

<내 삶 전체를 가난으로 설명하고, 그 삶을 심사받아야 한다. 탁자에 앉아서 내 사연을 심사하는 사람은 나 같은 상황을 겪어봤을까. 차라리 서류 뒤에 숨어서 가난을 증명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절차들 속에서 길을 헤매는 모욕은 마땅히 감수해야 했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35만 원짜리 집에서 떠오른 묘안은 하나다. 보증금이다. "주인 할머니 저예요. 1층 오른쪽에 사는,," 상황을 설명한다. 월세를 올리더라도 보증금을 반만 빼달라고 부탁한다. 이튿날 주인 할머니에게 난생 처음 만져보는 큰돈 1000만 원을 받는다.

 

저자는 그사이 군대 갈 때가 됐다. 아빠를 혼자 두지 않고 살 방법을 찾다가 '산업기능요원'이라는 병역 특례제도를 알게 된다. 산업 현장에서 2년 10개월을 일하면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다. 당연 근무 환경은 열악하고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산업기능요원 빼고는 한국인 노동자는 없고 전부 외국인 노동자다. 그러나 이것이 저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이다.  이 와중에도 저자의 간병 생활은 끝이 없다. 간신히 제 정신으로 돌아올 만하면 아빠는 삶을 포기하려는 듯 알콜에 의존하게 되고 끝내 다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진다.

 

거기다 알콜성 치매 증상까지 겹친다. 간병에 지친 저자는 이런 아빠를 버리고 멀리 도망 가고 싶다. 그래도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반듯하게 스무 살 청년은 이 난관을 헤쳐 나간다. 작가 지망생답게 글도 잘 쓴다. 시민단체에서 활동도 했고 영화 작업도 한다.

 

이 책은 9년 간 20대 전부를 온전히 병든 아빠와 함께 한 청년의 기록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안타깝고, 답답하고, 한심하고, 딱하고, 기막히고, 애틋하고 등 온갖 감정을 느끼게 한다. 고졸 흙수저 아들은 나쁜 아버지를 뒀고, 그 아버지는 좋은 아들을 뒀다. 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