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마루안 2020. 8. 3. 19:28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켰죠

숨 끊어지기 전에 도끼로 꼬리를 내려치세요

뼈와 살이 잘리는 것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엇입니까?

제게도 꼬리의 흔적이 있어요

피거품이 입을 막아 한마디 말 내뱉지 못했죠

손톱 발톱 다 빠지도록 바닥을 긁던 저녁

번갯불 관통하는 아픔으로 덮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내 꼬리를 잘라주어야 했고

나도 어떤 이의 꼬리를 모래언덕 깊숙이 묻었답니다

막 도착한 당신, 모래성 속으로 초대합니다

노을과 바람으로 몸을 씻어요

모래 미소와 모래 눈물로 배를 채우고

모래의 테라스로 걸어오세요 떠나간 모든 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안고 춤을 춥니다

잊지 마세요, 다 잊어버리세요 원반 같은 달 아래

엉덩이에 빗자루를 매단 코요테들이

발자국을 쓸어줍니다

스러지고 스러지고 스러질 마을

우리는 잘 마른 해골로 무도회장을 장식합니다

꼬리에 손대지 마세요

이곳의 예의랍니다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키면

도끼로 꼬리를 잘라주세요

더 늦기 전에 아주 늦기 전에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죠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49 - 이정훈

 

 

보이십니까?

바라보면 제 방이 보이십니까?

죽은 난초와 하얀 코끼리와 식탁

난초를 살리려 불면의 밤이 밝아옵니까?

북쪽으로 창이 난 저수지 옆 작은 집

느릿느릿 걸어나간 시간이 되돌아옵니까?

이월의 졸업식은 내년에도 성대합니까?

검정 가운을 입은 까마귀들이

계단에 늘어앉아 카메라를 바라봅니다

잊어버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아직 폐교되지 않았고요 추운 날에만

부어- 부어- ㅇ 우는 부엉새들이 호프집에 앉아

돌아앉은 마음 되돌리는 법에 대해 토론합니까?

그러다 먹지도 못할 것!

다 잊어버리고 노가리 한접시 추가합니까?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잡아먹지도 못할 것!

흰 코끼리를 제 방으로 추방합니까?

저는 무굴의 왕, 터번을 두르고 흰 코끼리와 인사합니까?

왕비를 돌보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않고

흰 코끼리만 쓰다듬었습니까?

아침저녁 황금 물뿌리개로 목욕시키고

공작새 깃으로 속눈썹 다듬어줍니까?

달밤에 코끼리와 산책합니까?

질투하는 왕비와 노한 백성들에게 쫓겨납니까?

코끼리를 업고 다니느라 무릎과 허리가 작살났습니까?

탁자 위에서 지나간 영화를 후회합니까? 

코끼리처럼 걸어나간 마음에 대해 생각합니까?

바위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기억합니까?

흰 코끼리와 죽은 난초가 있는 방의 의자가 되어

내년에도 학교에선 졸업식이 열리고

까마귀처럼 학생들은 잊지도 않고 계단에 앉아

슬로우 셔터로 찍힌 원경에

죽은 난초와 하얀 코끼리와 제가 조금 흔들립니까?

삭제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 수신 거절입니까?

 

 

 

 

# 이정훈 시인은 1967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쏘가리, 호랑이>가 첫 시집이다. <12+시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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