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 박춘희
처음부터
빨갛게 끓어오르진 않았다.
빈집
우체통 곁에
함께
눈비 맞고 오래 기다려 주다가
날이 갈수록
날 선 독촉장에
속을 있는 대로 끓였다지.
그 여름
죽은 목소리를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단다.
수위를 넘긴 우체통
언제부터 수취 불능 상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때쯤
맨드라미 껴안고 악을 쓰다가
독기 빠진 글자들
씨앗으로 콕콕 박혔단다.
죽은 편지를 들고
조문조차 꿈꿀 수 없었던 그해 여름
수취 불능을 끄고
맨드라미
천천히 죽어 갔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파란출판
감정의 바깥 2 - 박춘희
칠월 땡볕
끈질기에 꼬이는 파리 떼
누군가에게 사체는
구멍마다 알을 슬어 놓는
아늑한 자궁이 되기도 하는데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파리의 일생이나 개의 일생이나
사람의 일생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
개의 전생이란, 긴 시간도 짧은 시간도 아닌데
한 종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한데
담장 바깥,
뭉텅뭉텅 털갈이하듯
늙어 지친 꽃들
개의 일생이 얹혀
동공 속으로 간신히 졌을,
발을 놓쳐 버린 어둠이
개떼처럼 떠돌다 마침내
저 구멍마다 고인
꽃향기를 틀어막고
구더기 떼 새까맣게
꾸역꾸역 쏟아 내던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이현승, <연루>.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 김윤배 (0) | 2020.07.31 |
---|---|
첫 배를 타야겠다 - 이강산 (0) | 2020.07.30 |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0) | 2020.07.30 |
장마 이후 - 김정수 (0) | 2020.07.29 |
탈상 - 강민영 (0) | 2020.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