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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 권혁란

흔히 죽기 딱 좋은 날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유명한 싯구도 있다. 아무리 상투적이라도 질리지 않는 문구임은 틀림없다. 이 책을 읽으면 가슴에 착 감기는 이 문구가 얼마나 소용 없는 문장인지를 알게 한다. 이 책은 작가 권혁란이 90세에 세상을 떠난 친정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이야기다. 원래 작가는 없는 얘기 지어내거나 경험한 일을 적더라도 각색을 한다. 그래서일까. 책에 실린 이야기가 순도 100% 실화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깔고 읽었다. 작가의 책이니 문장은 아주 술술 읽힌다. 작가의 어머니 김봉예 여사는 여섯 자식을 두었다. 작가는 김여사의 막내 딸이다.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김봉예 여사는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 누구나 짧게 앓다가 깔끔하게 죽기를..

네줄 冊 2020.10.15

나도 가을이었다 - 유기택

나도 가을이었다 - 유기택 새벽 달빛이 밝아 성긴 별빛에도 어느 겨를에 겨울 별자리가 선명합니다 새벽빛 어둑한 계단을 내려서다 가을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 얼른 쓸쓸한 말들이 다녀갑니다 잘 가, 나로 서로웠던 애인들아 별빛 하나 아스라이 닫히다 사각의 평평한 지도 위에 눈이 내립니다 가을날 눈이 내리는 달밤 그런 가만한 어깃장 같은 생각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시집/ 호주머니 속 명랑/ 북인 가을 서정 - 유기택 우두벌 온수지로 흘러 들어간 버림 물은 붉은 저녁 구름장들이 화장용 거울로 사용했다 가만히 떠 있는 붉은 저녁 구름과 오리들 붉은 구름장이 가새이부터 푸르게 바뀌는 동안 오리 떼에서 조용한 소요가 일었다 여러 작은 무리로 나뉘어 동동거리며 마지막 자맥질을 서로 독려 중이었는데 사라지는 붉은 ..

한줄 詩 2020.10.15

샘밭 막국수 - 전윤호

샘밭 막국수 - 전윤호 종일 뛰어다녀도 건진 건 없고 등 찌르는 손가락질이 무서운 저녁 허물어진 안개 자욱한 샘밭에서 웅덩이 같은 허기 발을 잡는다 서울사람 물 준다고 오억 톤 우울을 가둔 소양댐은 세상 쓸쓸한 유령들이 버스 타고 오는 종점 도대체 왜 그러고 사냐고 그대는 떠나고 언제든 불러만 달라 장담하던 휴대폰마저 꺼진 시간 어두운 마당 지나 노란 불빛 흔들리는 문 열면 어서오세요 인사 건네는 저 할머니는 이 동네 지박령 노을이 풀어진 막국수에 소주 한 병 대충 살지 못한 사람들이 지내는 오늘 하루 제사 국수는 지친 영혼이 들이키는 음복 이별 터진 고랑에 메밀 심고 슬픔 갈아 반죽 쳐대면 세상은 여기서 멀지만 지금은 겨자와 식초를 치는 시간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

한줄 詩 2020.10.15

백운대행, 진관사 - 정기복

백운대행, 진관사 - 정기복 한 점 가을 붉다 저 불쏘시개 하나가 열흘 이내 온 산 불사를 것이다 진관사 계곡으로 비봉 오르다 척후병으로 와 불붙은 한 점 단풍 본다 앞길에 놓은 능선의 숱한 잎들 점점이 붉게 물들이던 산사람의 걸음을 흉내 내듯 깊은 골을 걷는다 분홍으로든 주황으로든 누구의 손가락 마디 하나, 옷자락 한 뼘 적셔보지 못하였으나 언젠가는 내 심장은 격발의 순간으로 가쁘게 물든 적이 있었다 젖어 든 추억과 받아들인 기억 왼발 오른발 번갈아 디디면 어느덧 비봉과 향로봉의 갈림길이다 가을빛 처연한 오늘 이왕이면 가파르고 험한 바람길 택한다 무심한 내 발길은 젖은 잎 한 장 말리지 못하나 한사코 벼랑에 매달리던 그대의 심사는 한 잎 붉게 피워 온 산 불사른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

한줄 詩 2020.10.15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 이병률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 이병률 어서오세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혼자 어느 음식점에 갔다가 난데없는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온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묻는다 아, 그냥 우연이겠지 인사와 안부 모두가 내가 속하는 집합의 순간들이겠지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 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늘 드시는 걸로 드릴게요, 라고 한다 나는 수굿하게 그러라고 말한다 판이 어떻에 돌아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배우로 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하는 일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

한줄 詩 2020.10.11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 세상의 모든 종말은 내 처음의 것. 말이 늦다. 유음은 배워 두고 받침은 잃어버린다. 문자의 유전자는 사라지지 않고 심장 아래 잘 끼워진다. 아직이거나 이미였던 것들에 달린 열성의 꼬리표. 날이 차면 산이 밝아진다. 코끼리 뼈를 상처 없이 도려내고 한 줌 모래알을 쥐고 단풍잎에 한 손을 올린다. 배경이 사라지고 창살만 남는다. 손가락을 벌린다. 느리게 감옥은 커진다. 칸막이 하나다. 밤이 무덤을 열어 문에 들어앉는다. 지키지 못한 임종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턱을 성호의 방향대로 긋는다. 신음은 낮고 치명적으로. 둥지에서 죽지 못한 아기 새에게. 부디. 산 자의 놀음. 죽은 자의 기도. 뒤로 돌아 걸으며. 세상의 모든 탄생은 나 다음의 일. 거기서 나는 그림자를 떠메고 간다..

한줄 詩 2020.10.11

저 가을빛 - 김상렬

저 가을빛 - 김상렬 구렁이 담 넘어오듯 가을이 온다. 죽어 나자빠져도 못내 지워지지 않을 징하고 징한 그대 그리움 끌며. 잔생에 무슨 업장 타고났기에 우리 인연은 이다지도 질긴 것이냐. 시집가자마자 객혈 쏟으며 쓰러진 사촌누님의 가슴속 같은 저 가을빛. 여름 한철, 뱀 잡아 날뛰다가 뱀한테 물려 죽은 어느 땅꾼의 해진 양말들이 감전의 전기 빨랫줄에 내걸려 있다. 부신 가을 날빛 속에 거꾸로 매달려 바람 든 백골로 흐느끼며 나부낀다. 하늘은 한 사랑으로 미친 듯 짙푸르고 붉은 잎들의 시샘은 불난 듯 환장이더니 낮잠 한숨 자고 나니 또 어느새 건너편 산자락은 딴 세상의 이내 빛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을이 간다. *시집/ 푸른 왕관/ 새숲 이명(耳鳴) - 김상렬 그리움이 깊으면 귀도 점점 멀어지는가. ..

한줄 詩 2020.10.11

살아남은 그림들 - 조상인

코로나가 너무 많은 일상을 바꿔 놓는 바람에 전시장 가 본 지도 한참이다. 전시장뿐인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공연장을 갔는데 무대 예술을 접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전염병이 금방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아 당분간 그런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이 책은 미술 이야기다. 우리 근대사가 혼란과 비극의 연속이었듯이 예술가들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에 근대 미술을 받아 들인 우리로써는 일본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남북이 갈라지면서 예술 분야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월북을 했으면 언급이 금지 되었다. 당연 오랜 기간 잊혀진 예술가였다. 시인들 중에도 아까운 사람이 많다. 정지용, 백석, 오장환, 임화 등 빼어난 시인들이 분단의 비극 속에서 창작을 멈추거나 오..

네줄 冊 2020.10.11

종말의 밥상 - 박중곤

책 제목과 함께 책 표지에 실린 그림이 너무 강렬하다. 종말이라는 말은 일부 열성 기독교인들이 철석 같이 여기는 믿음이기도 하다. 20년 전에 세기말이 다가올 무렵, 휴거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들은 정말 곧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믿음이 약한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했다. 믿음은 자유이니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종교의 자유가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책도 밥상의 종말을 말하면서 표지 그림은 바이러스가 담긴 숟가락를 보여주고 있다. 섬뜩하다. 인간 욕심의 후과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인 코로나로 지구촌이 완전 황폐화 되면서 일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류는 늘 전쟁과 질병을 이겨 내며 고난을 극복하고 생존했기에 이 난국도 언젠가는 진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환경..

네줄 冊 2020.10.10

맑은소머리국밥 - 이강산

맑은소머리국밥 - 이강산 저만치 낮술을 홀짝이는, 영 서툰 술 솜씨의 여자는 잘해야 마흔두엇, 그 어름 나보다 이십 년쯤 앞에서 생의 탁류에 휩쓸렸구나, 힐긋힐긋 맑은소머리국밥을 먹는다 꽃이든 상처든 무엇인가 손에 거머쥐지 않고서야 저렇듯 확고한 침묵일 수 없는 노릇, 여자는 내 불순을 읽은 듯 내게 해명할 겨를도 주지 않고 홀로 막장처럼 깊어진다 몇 굽이 물살을 건너와 잠시 쉬는 나는 그만 일어서려 하지만 국밥이 발목을 잡는 것이어서 마주 앉은 채 공연히 민망해지다가 당장이라도 소의 눈물을 떨굴 것만 같은 여자와 국밥과 낮술의 필연에 골똘해지다가 불현듯 생의 골짜기를 휘어 도는 나의 탁류가 눈에 밟혀 조용히 맑은소머리국밥을 휘젓는 것이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쁜이 유감 - 이강산 효..

한줄 詩 2020.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