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마루안 2020. 10. 5. 19:28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 김이하


아침에 한 사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간밤엔 그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 땅덩이가 움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는구나, 마음 끝자락 하나 기댈 수 없어 가는구나 싶어
한없이 우울한 가을빛이 창을 가득 메운다

저 푸른 하늘은 왜, 쓸쓸한가
가슴 깊은 곳의 눈물까지 길어 올리는가
퍼렇게 멍든 마음들 하나의 바람으로
꺽꺽 울며 외치는 시위(示威)구나 싶은데
살고 싶어 죽을 만큼 소리치는 아우성이라 하고 싶은데
혹은 개새끼라 욕하는 울근불근 악다구니라 하고 싶은데

이젠 찬 기운 스미는 방문을 열고
거리로 나설 힘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스러질 것인가, 소멸을 준비해야 하는가
가슴에 새긴 바람은 너무나 뚜렷한데, 더욱 뚜렷해지는데
버티고 서 있어야 할 힘은 겨우 이뿐인가

한 사내, 한 죽음의 기별이 모든 생각을
밥상 한켠으로 밀치고 앉아
어느새 어둠을 가득 채운 이 저녁은
스치듯 지나가는 몸뚱이 없는 옷자락들
느닷없는 바람에 떠밀려 하늘로 솟구친 비닐봉지 같은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한순간이 되었다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별개(別個) - 김이하

 

 

이젠 서로 별개(別個)다

 

내 몸에서 나서 자라

오랫동안 나를 지켜 주던 어금니 두 개

오래 전 썩었으나 그 위에 금(金)을 덧대어

또 한동안 살갑게 살아 주었으나

그예 이 독한 생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져 덜렁거리면서도 슬픔을 견뎌 주었으나

오늘, 함께 살려 한다는 건

다 함께 죽자는 건가 싶어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 버리고

이젠 그 휑한 자리로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들 들어 앉아

한동안 잎새 떨어진 가지 끝에서 새싹을 바라보듯

가망 없을 시간을 보내련다

그러다, 문득 돌아앉아 지친 입술을 깨물 때

이도 저도 아닌

덤덤한 늙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겠지

 

별개(別個)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겠지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그냥, 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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