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

마루안 2020. 10. 11. 19:46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


세상의 모든 종말은 내 처음의 것.

말이 늦다. 유음은 배워 두고 받침은 잃어버린다. 문자의 유전자는 사라지지 않고 심장 아래 잘 끼워진다.

아직이거나 이미였던 것들에 달린 열성의 꼬리표.

날이 차면 산이 밝아진다. 코끼리 뼈를 상처 없이 도려내고 한 줌 모래알을 쥐고 단풍잎에 한 손을 올린다. 배경이 사라지고 창살만 남는다. 손가락을 벌린다. 느리게 감옥은 커진다.

칸막이 하나다. 밤이 무덤을 열어 문에 들어앉는다. 지키지 못한 임종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턱을 성호의 방향대로 긋는다. 신음은 낮고 치명적으로.

둥지에서 죽지 못한 아기 새에게. 부디. 산 자의 놀음. 죽은 자의 기도. 뒤로 돌아 걸으며.

세상의 모든 탄생은 나 다음의 일.

거기서 나는 그림자를 떠메고 간다.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

 

 

 

 

 

 

빛의 기원 - 전형철


수많은 문들 앞에 제단을 쌓고
낮에만 향과 불을 피우다
몸을 부어 재까지 쓸어 냈다

어둠의 눈이 별이고
하늘의 장자가 별이고
천궁의 종기가 별이고

눈먼 필경사의 중얼거림이
빛의 심장을 찢어
제단을 적시면

기다리는 것과
기리는 것과
기대는 것이
다르지 않았다

하늘을 이고 산다고 믿는

어둠을 걸어 둔

종족이 있었다




# 전형철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이 있다. 조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성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