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살아남은 그림들 - 조상인

마루안 2020. 10. 11. 18:35

 

 

코로나가 너무 많은 일상을 바꿔 놓는 바람에 전시장 가 본 지도 한참이다. 전시장뿐인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공연장을 갔는데 무대 예술을 접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전염병이 금방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아 당분간 그런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이 책은 미술 이야기다. 우리 근대사가 혼란과 비극의 연속이었듯이 예술가들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일제 강점기에 근대 미술을 받아 들인 우리로써는 일본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남북이 갈라지면서 예술 분야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월북을 했으면 언급이 금지 되었다. 당연 오랜 기간 잊혀진 예술가였다. 시인들 중에도 아까운 사람이 많다. 정지용, 백석, 오장환, 임화 등 빼어난 시인들이 분단의 비극 속에서 창작을 멈추거나 오랜 기간 잊혀졌다. 

 

분단에 이어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작품마저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광수, 서정주, 김동인, 모윤숙 등 빼어난 작품을 남겼으나 친일 작가라는 딱지가 지금도 붙어 있다. 인재의 손실이자 문화예술의 후퇴다. 이 책에 나오는 구본웅도 친일 작가다. 

 

가정이지만 만약 일본의 식민 지배을 받지 않았더라면, 분단이 없었다면 얼마나 풍성한 예술적 토대를 이룰 수 있었을까. 우리가 못나서 일어난 일이고 민족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진정한 예술의 길을 걸은 화가의 인생을 알았다.

 

이미 알고 있는 화가가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책은 드물다. 이 책에서는 자그마치 37명의 화가를 다루고 있다. 나혜석부터 이승조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품을 남긴 화가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몇 작가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나혜석이야 워낙 많이 알려진 비운의 인물이고 나는 배운성의 일생이 흥미로웠다. 근대의 화가들은 대부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술은 돈이 없으면 하기 힘들다.

 

배운성은 가난 때문에 15살 무렵부터 더부살이를 했다. 운 좋게도 동네 갑부 아들의 몸종으로 들어간다. 갑부는 백인기, 아들은 백명곤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동무이자 몸종으로 또래인 배운성을 택한 것이다. 백명곤의 일본 유학길에도 따라 간다.

 

배운성이 화가의 운명이었는지 백인기는 아들을 독일로 유학을 보낸다. 당연 몸종인 배운성도 동행한다. 1922년 스물 둘의 배운성은 베를린에 도착한다. 거기서 미술에 눈을 뜬다. 백명곤이 병으로 귀국을 할 때 배운성은 독일에 남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한다. 작품을 인정 받아 독일에서 개인전도 연다. 거기서 독일인 아내를 만나고 자식까지 뒀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배운성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홍익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배운성은 한국 전쟁 후 북쪽을 택한다.

 

월북 작가의 남쪽 평가는 뻔하다. 언급은 금지 되고 잊혀졌다. 배운성은 북에서 평양미술대학의 기틀을 마련해 후학을 길러냈다. 1978년 신의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배운성이 1940년 초 독일군 파리 점령을 피해 부랴부랴 떠나면서 작품을 몽땅 두고 왔단다.

 

그 작품들 일부가 파리 골동품 가게에서 극적으로 발견된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불문학자 전창곤이 48점 전부를 구입해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다. 배운성의 예술 세계가 한국에 알려진다. 한 편의 영화 같은 배운성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읽은 것만으로 이 책은 제값을 했다.

 

작가의 일생을 다루면서 몇 편의 대표작들을 감상하는 것은 덤이다. 작가를 이해하면서 그림을 보니 작품에 대한 이해가 훨씬 빠르다. 훌륭한 예술가와 좋은 작품이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