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 이병률

마루안 2020. 10. 11. 21:37

 

 

닮은 사람 하나가 어디 산다는 말이 있다 - 이병률


어서오세요 오랜만에 오셨어요

혼자 어느 음식점에 갔다가 난데없는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온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묻는다
아, 그냥 우연이겠지
인사와 안부 모두가 내가 속하는 집합의 순간들이겠지

한 번만 더 앞뒤가 맞아버리면
여기를 뛰쳐나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늘 드시는 걸로 드릴게요, 라고 한다
나는 수굿하게 그러라고 말한다
판이 어떻에 돌아가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배우로 사는 것도 좋겠어
내가 나에게 좋은 배역을 주거나 하는 일
삶의 통역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의 나를 나에게 잘 설명해주거나 하는 일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슬픔이라는 구석 - 이병률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샘밭 막국수 - 전윤호  (0) 2020.10.15
백운대행, 진관사 - 정기복  (0) 2020.10.15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  (0) 2020.10.11
저 가을빛 - 김상렬  (0) 2020.10.11
맑은소머리국밥 - 이강산  (0) 2020.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