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맑은소머리국밥 - 이강산

마루안 2020. 10. 10. 19:32

 

 

맑은소머리국밥 - 이강산


저만치 낮술을 홀짝이는,
영 서툰 술 솜씨의 여자는 잘해야 마흔두엇, 그 어름

나보다 이십 년쯤 앞에서 생의 탁류에 휩쓸렸구나,
힐긋힐긋 맑은소머리국밥을 먹는다

꽃이든 상처든 무엇인가 손에 거머쥐지 않고서야
저렇듯 확고한 침묵일 수 없는 노릇,

여자는 내 불순을 읽은 듯
내게 해명할 겨를도 주지 않고 홀로 막장처럼 깊어진다

몇 굽이 물살을 건너와 잠시 쉬는 나는
그만 일어서려 하지만 국밥이 발목을 잡는 것이어서

마주 앉은 채 공연히 민망해지다가
당장이라도 소의 눈물을 떨굴 것만 같은 여자와 국밥과 낮술의 필연에 골똘해지다가

불현듯 생의 골짜기를 휘어 도는 나의 탁류가 눈에 밟혀
조용히 맑은소머리국밥을 휘젓는 것이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쁜이 유감 - 이강산


효촌마을 골목 책가방만 한 이쁜이 식당은 문 닫기 전까지 이쁜 밥을 팔았을 것이다
내가 닿기 전에 떠난 이쁜이 식당 사람들도 밥처럼 이뻤을 것이다

십중팔구 주인의 주름도 이뻤을 것이다

간판만 남은 정동여인숙 이쁜이집 삐끼 노파와 2만원짜리 하룻밤도 이뻤다
용암사 뻐꾸기 속살을 더듬던 여우비,
멋모르고 여우비를 따라간 풍경 소리도 이뻤다

그러고 보니 나와 눈 맞춘 이쁜이들은 죄다 사라졌다

계족로336번길 양철 대문 앞 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늙은 자전거도 이쁘다
자전거의 손목 잡고 나란히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아흔 둘 노인도 이쁘다

자전거도 노인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쁜이 식당처럼 문 닫고 떠나겠지만
나는 이미 사라진 이쁜이를 여럿 알아서

이제부턴 내 곁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추한 것들에 대한 편애를 궁리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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