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도 가을이었다 - 유기택

마루안 2020. 10. 15. 19:23

 

 

나도 가을이었다 - 유기택


새벽 달빛이 밝아 성긴 별빛에도
어느 겨를에 겨울 별자리가 선명합니다

새벽빛 어둑한 계단을 내려서다
가을이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
얼른 쓸쓸한 말들이 다녀갑니다

잘 가, 나로 서로웠던 애인들아

별빛 하나 아스라이 닫히다
사각의 평평한 지도 위에 눈이 내립니다

가을날 눈이 내리는 달밤
그런 가만한
어깃장 같은 생각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시집/ 호주머니 속 명랑/ 북인

 

 

 

 

 

 

가을 서정 - 유기택


우두벌 온수지로 흘러 들어간 버림 물은
붉은 저녁 구름장들이 화장용 거울로 사용했다

가만히 떠 있는 붉은 저녁 구름과 오리들

붉은 구름장이 가새이부터 푸르게 바뀌는 동안
오리 떼에서 조용한 소요가 일었다
여러 작은 무리로 나뉘어 동동거리며
마지막 자맥질을 서로 독려 중이었는데
사라지는 붉은 것들의 인양에는 실패한 듯했다

저녁에서 붉은 물이 빠져나가는 동안
회색으로 탈색한 머리카락 뿌리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아이와
단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슬픈 껌의 동안

우리가 애써 잊으려는 것들의 동안

샘밭 쪽을 시내로 싣고 가는 13번 시내버스는
주말 저녁이었으므로 텅텅 비는 일에 열중했다
듬성듬성 남은 사람들이나 오리 떼나
핸드폰의 낙담을 포대기처럼 둘러쓰고 앉아
모두 다, 저녁을 지낼 일에만 골몰했다

시내는 언제나 생각보다 먼 곳에 있어
들판에다 풀어놓은 푸른 이내는 좀 더 멀리로
흐려지다 멀어지다 시내 쪽에서 아주 사라졌다

이내 같은 이들이 사라지는 터미널로 간다

여기보다 조금 더 멀리 가서 멈춘 거기로 간
먼저 가 있을, 풀죽은 걸음 소리들을 떠올리다
여기쯤서 그만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멎었다, 모두 잘 지내게 될 거야

벌떡 일어서려다 왼쪽으로 조금 기웃했다
비어, 걸음 텅텅 울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등 쪽으로만 흐리게 나 있다

샘밭에선 아내가
끓이던 청국장을 태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유기택 시인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시집으로 <둥근 집>, <긴 시>, <참 먼 말>, <짱돌>, <호주머니 속 명랑>이 있다.  2018년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