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마루안 2020. 11. 30. 19:57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초겨울 밤에 - 황동규


창밖엔 소리 없이 된서리 내리고 있었겠지.
밤 11시 반.
텔레비에서 말들이 날아오다 방바닥에 떨어진다.

깜빡 졸았나?
애써 잡은 영양 하이애나들에게 빼앗긴
치타 어디 갔지?
대답 대신 느낌들이 날아와 귓바퀴에 박히며
꼬리들을 떤다.
그래 알겠다, 안 들어도 알겠다.
뭘 이뤘다고 다 제 게 되는 게 아니다.
남기면 남의 것 되고 모자라면 내 것 된다.
그래도 남겨라, 이거지.
하이에나들이 인간처럼 웃었거든.
가만, 이런 생각들도
창밖의 된서리를 피할 수는 없을 거다.
길 잃지 말자고 갈림길 나뭇가지에 매어논
색 바랜 리본들로나 남을까.
젖은 눈 내리면 영락없이 상처로 보일 거다.



 

# 쓸쓸함과 함께 노시인의 아름다운 인생이 느껴지는 시다. 세상을 달관한 듯 초연한 문구들이 시리게 다가온다. 태어나면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늙음이다. 젊어 봤으니 이제 나도 늙을 차례, 훗날 시인처럼 아름다운 눈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갈수록 오는 봄보다 가는 가을에 미련이 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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