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월광소나타 - 권지영

마루안 2020. 11. 30. 19:47

 

 

월광소나타 - 권지영


어스름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울기 좋은 골목 앞에 먼저 온 달이 앓고 있다
달은 등 뒤로 이는 인기척을 알지 못하고
짙은 코발트 하늘을 향해 그렁그렁 목숨을 삼킨다
하루치의 눈물은 어디로 달려갈까

철제 대문 손잡이에 매달린 끈을 잡아당긴다
대문과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방의 현관문
그 안으로 쥐구멍 숨어들 듯 기어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잠을 청한다

다행이다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은 주인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하려 한다
울고 있는 달빛을 묻히고 들어오다
가루를 흘리지 않았던가
겉옷을 털고 신발을 소리 없이 벗었던가
인기척에 들뜬 방문이 열리지 않기를 숨 참으며 기도한다
날이 새면 다시 흔적을 지우듯 방 한 칸과 이별을 해야 할까

모두가 떠나버린 고흐의 노란 방에서 사랑과 우정을 노래로 만든다
달이 이고 떠오르는 바람이 되어
달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성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멀리 가보리라, 더 살아야 한다


*시집/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달아실출판사

 

 

 



펜데믹 - 권지영


마스크를 줄 서서 산다
요일별로 산다
나눠서 산다
사지 않는다 

영화에도 없던 장면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밥을 따로 먹고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마침내 재난영화가 현실이 되고
공상과학영화가 다가오고 있다
아무도 미래를 믿지 않는다
볕 좋은 날
누구도 꽃구경을 가지 못한다 

봄날의 축제가 바이러스로 죽고
구원받으려는 자들은
자비 없이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헌금으로 지은 궁전에는 늙은 여우 하나
무심한 세월을 쌓아올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공작원처럼 곳곳에 퍼진 바이러스 

오랑시에서 건너온 쥐들이
십자가로 몰려들었다는 소문은
감염병처럼 퍼졌다
잡고 뿌리고 잡고 뿌리고
쥐들이 숨을 데가 없어 손을 들었다
구원은 가장 낮은 데서부터 온다
아직도 착한 사람에게 용이하다

 

 

 


*시인의 말

나도 모르는 사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뜨거움도 차가움도
물이 되어 흐른다

생각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고개 들면 곁에 와 앉은

슬픔의 정원
그칠 줄 모르는

당신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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