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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서 봄에게로 - 이태관

가을에서 봄에게로 - 이태관 이슬이 눈물이었다는 듯 떨어져 내리는 낙엽, 그 순간의 무게가 가을을 저물게 한다 눈 뜨는 햇살은 그 눈물 불러 모으시는 어머니 밤새 가라앉은 고요가 서서히 풀려나온다 허리 펴는 강물 위로 안개 자욱하다 무겁던 나무 그늘 사이로 햇살 보이면 얽히고설킨, 겹치고 겹친 생의 이면이 조금은 환하다 흰머리 늘고 머리카락도 조금은 느슨해지는 시절 비로소 사람을 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바로 보인다 주름과 살에 한 생이 담겨 있다 나와 닮은 이여 평안하시라 쑤시는 삭신 고달픈 몸을 지나 꿈에서라도 행복하기를 그리고 흰 눈 내리는 날 두 발길이 하나가 되어 새순 돋는 추운 계절에 그대 입술에 닿는 그해 마지막 흰 눈송이이기를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 달아실 침향 - 이태관 저 나무, ..

한줄 詩 2020.11.21

파장 - 이돈형

파장 - 이돈형 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일로 고요한 상자처럼 남아 있다 쌓여 있는 물건을 거두며 스스로 허리를 꺾듯 서둘러 격려하듯 하루를 트럭 위에 싣는다 네게서 흩어진 저녁이 입을 오므린다 어디까지 왔니, 어디까지 왔니, 온종일 밀린 기분으로 걸음이 빨라지는 너는 사람들이 휘저어놓은 일렬횡대의 짧은 곡선을 휘잡아 일시에 내일로 보내는 너는 아득해도 파장 입에 물려 있던 벌판처럼 펼쳐놓았던 바닥을 쓸며 휩쓸려 가는 입을 식힌다 예감이 사라진 짐칸의 노끈처럼 '언제가'로 채워진 바닥은 영문도 모른 채 이쯤에서 어둠과 뒤섞이고 이동하는 저녁은 불빛이 없다 씻기듯 씻어내도 흔한 어둠과는 다투지 않는 사람처럼 시동을 걸고 있는 너는 어디까지 가니, 어디까지 가니,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한줄 詩 2020.11.21

각자도생 - 박태건

각자도생 - 박태건 검은 옷을 입은 날이면 슬픈 소식이 먼저 온다 환절기에는 귀가가 늦고 사무실 문 앞의 김영혜 선생님은 이십 년째 같은 자리다 퇴근할 때 힐끗 보니 책상에 엎드려 있다 나는 봉투를 챙겨서 조용히 나온다 검은 옷의 주머니에는 수치심에 젖은 손이라든가 실연한 연인의 속눈썹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옷장 속의 검은 옷은 아무리 반듯하게 걸어 놓아도 어딘가 한쪽은 기울어 있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비닐봉투 - 박태건 그날이 오면 비닐봉투를 산다 비닐봉투에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니까 술과 말린 꽃과 그리고 행복했던 추억 몇 장, 술을 따라 놓고 생각에 잠기다 참, 술은 못 드시잖아! 그보다 나이가 많아진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그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생..

한줄 詩 2020.11.21

원자력발전의 사회적 비용 - 김해창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 수명 지난 원전 처리 등 탈원전 문제로 갑론을박을 할 때부터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책 욕심이 많아 읽고 싶은 책은 밀려 쌓이고 시간은 없고, 그러다 보면 못 읽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 늘 아쉽다. 이 책은 실천하는 참 지식인 김해창 교수의 신간이다. 그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 한 권만으로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환경정책의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예전의 쓴 책 에서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 했다. 이 책도 탈원전 에너지 정책이 왜 필요한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외국 사례와 한국을 비교하고 이전에 일어났던 원전 사고와 일어날 위험성을 일깨운다. 지금부터 탈원전 정책을..

네줄 冊 2020.11.20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일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눈 감고 싶어 울고 싶어 마음껏 소리칠래 아침부터 취해버릴래 다 그만두고 싶은데 일어나서 세수를 하지 아침 먹고 가방 들고 출근을 하지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지 점심도 먹고 담배도 피우지 나를 일이켜 세우는 건 그저 습관 배고픔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 월급날 슬픔은 얼마나 무력한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저 그런 것들 쓸쓸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인데 내 집이 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넓고 깨끗하면 좋겠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월급이 좀더 오르면 좋겠어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어 그럴 듯한 새 시집을 내고 싶어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으로 나는 살아가지 얼마나 다행하고 다행한 비극인지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장담은 ..

한줄 詩 2020.11.20

시간의 골계 - 서상만

시간의 골계 - 서상만 오늘은 또 몇 개의 세포가 죽었을까 몸이 나른한 날은 청진기가 없어도 세포가 파삭파삭 죽어가는 걸 느낀다 가끔 아령을 들고 근력을 보태면 가뜩이 마른 마들가리 나이 타령 하며 싱겁게 난다 긴다 해쌓지만 때 되면 그 다 녹초 될 것 뻔하니 삭아도 잘 삭아 진국 소리 듣거나 저 겨울나무처럼 영혼에 몸 맡기고 한량으로 놀다 가면 그 또한 어떠리 한 오백 년 살듯 죽기 살기 서성대도 하루아침 뜻밖 이승도 여기까지라면 공산에 달 뜬들 뭣 하나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하직(下直) - 서상만 -나에게 죽음이야 지척에 와있는 줄 없는 후생이니 직행하든지 유성우(流星雨) 지는 밤 차라리 생혼화석으로 남든지 인적 뜸한 공터에 하얗게 개망초로 몰래 피든지 그도 저도 아닌 먼먼 나라 패왕에 불..

한줄 詩 2020.11.20

십일월 - 전윤호

십일월 - 전윤호 내가 아는 사람은 모두 떠났다 아무도 모르는 거리에서 허공을 과적한 트럭처럼 휘청거려도 밥집들은 제 시간에 문을 닫고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다 눈물로 모인 호수는 망자들의 집 놀라게 할 가치도 없는 사내 하나쯤 제방에 앉아 노래하면 어떠리 음정도 안 맞는 돌팔매로 제 얼굴을 맞추면 또 어떠리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맨 끝자리에 혼자 앉은 조문객으로 이 가을이 또 저무는 것을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OST - 전윤호 남의 이야기에 묻히고 싶어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에 대충 나오고 싶어 어차피 주인공이 아니니 인상적인 부분도 없고 슬픈 죽음도 없겠지 그래도 노래는 청승맞게 부를래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빠른 박자는 취향이 아니야 댐이 막은 강처럼 느리게 ..

한줄 詩 2020.11.20

발목 - 조우연

발목 - 조우연 오거리 횡단보도 옆에서 밥상장수가 밥상을 팔고 있다 개다리소반부터 교자상, 고족상, 두리반까지 짧고 굵은 상다리부터 길고 매끈한 상다리가 가로수 아래 꼿꼿이 중심을 잡고 섰다 식탁에게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은 발목들 어둑한 저녁 밥상 자근자근 말대가리가 물이 오르면 어김없이 밥상부터 날아갔던 가난한 시절 찰과상으로 버틴 뚝뚝한 밥상 발목을 닦아 세우며 눈물 흥건한 소반다듬이를 하던 어머니들 가슴속 벌레 먹은 콩을 밤새 골라냈는지 모른다 요기 때가 되면 접었던 발목을 차례로 잡아 펴고 밥그릇 대신 책을 펴고 앉던 발목들은 밥상머리들이 비대해져 예의 겸양해지던 때가 있었다 화롯불 같던 둥근 온기가 사라진 식탁 아래 발목은 굽힐 줄 모르는 버릇의 부재 바닥으로부터 가깝고도 낮은 소반 한상 차림 ..

한줄 詩 2020.11.16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양철지붕 벌겋게 녹슨 늦가을의 정미소엔 아직도 얼기미에서 유리알 쌀이 무척 쏟아질까 아무려나 곤고의 일에서 좀 놓여나면 노란 왕겨가 마굿간으로 수북수북 쌓이던 정미소 그 향기 속에 좀 들러 불까, 몰래 뒷짐 지고 들러 신신한 쌀 냄새에 흠흠거리며 쌀 한입 탁 털어 넣고 씹다 보면 고소한 쌀즙이 이내 입안에 가득하겠지 그러면 참새 떼도 아니 들르고는 못 배겨서 이따금 주인이 훠이, 하고 내질러도 아예 천국의 맛을 쪼는 데 열심일 거야 마을과 저만치 떨어져 있어도 통통통통 울려 대는 발동기 소리가 마을과 들길을 단박에 장악해 버리던 늦가을 정미소, 아무려나 왕겨며 쌀가마가 산처림 실리면 히잉, 말조차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말 달구지는 마을 집집으로 내달릴 걸 그러면 겨우내..

한줄 詩 2020.11.16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필름 속에 빛이 흐르게 두는 건 누구의 짓일까 - 강혜빈 ​ 눈 없는 인형을 줍는다 맨발로 암실 속을 걸으면 발끝에 치이는 머리들 부드럽고 차갑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 없이 누가 먼저 죽을까 봐 걱정할 일도 없이 마주 앉아 찬밥을 퍼먹는 저녁 완전해지려고 스스로 손목을 깨무는 노을처럼 몸보다 먼저 말을 밀어내려는 식탁에서 너는 가끔 사람처럼 군다 내가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동안 표정 없음에 대해 배 속에서 자라는 소음들에 대해 하고 싶음에 대해 납작한 비둘기를 쪼아 먹는 빵 조각들에 대해 내가 기어코 벤치의 두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죽은 줄 모르는 것들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잘 울지 않는 게 강한 걸까 물어보면 참을수록 햇빛과 친해질 수 있다고 답하듯이 산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하기 때문에 ..

한줄 詩 20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