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마루안 2020. 11. 29. 19:16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를 좋아했다 날개가 색을 입잖아, 말하는 얼굴이 오묘한 자국을 냈다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오빠에게 오빠의 책을 읽어준다 우리가 읽어냈던 구름을 베개에 넣으니 병실 속 꽃처럼 어울린다 영혼이 자라는 코마의 숲에서 알몸으로 뛰는 오빠는 언제나 입체적이다 책을 태우면서 연기는 헤엄치거나 달리거나 다분히 역동적으로 해석되고

젖은 몸을 말리지 않은 건 구름을 보면 떠오르는 책과 내 사람이 있어서라고

너의 숲에서 중얼거렸어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알비노 인간 - 김희준


페어뱅크스 산골짝에서 자랐어요
하얀 숲에선 잠들지 말아야지
입김에 갇힌 알래스카의 여름에는 더더욱
태양에게 선택받지 못한 족속은 일찍 계절을 앓았다

근사한 변명으로 얼룩진 DNA
한낮 너머에서 태어나는 새
숲을 지나는 태생이 위태롭다
멜라닌이 부족한 구름은 적당하게 성교하고
올바른 부피로 다시 부풀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남의 집 지붕에 빨래를 널었다

새떼를 가둔 구름이 몸을 털면 엄마의 이불로 숨어드는 새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먹구름의 문장으로 도래하는 불온한 살덩이
근친의 흔적을 하얀 숲의 기울기로 읽어내는 새는
그날의 일기를 구름에 적어두다가 색을 잃는다

색이 색을 버리고 내가 나를 버리고
문장이 하얀 몸을 닮아갈 때
먹구름이 살갗을 파고든다
알래스카로 떠난 새는 평생 죽을 곳을 찾는다는데
우리의 무덤은 속이 헐거운 지붕이거나
새의 깃털로 엮은 커튼이거나
엄마와 나는 서로를 핥으며 멜라닌을 채웠다

돌연변이가 돌연, 변이를 낳던 날
태양의 행방이 묘연했다
비가 내린다
젖은 거리에 날개를 움츠린 새떼가
알래스카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시인의 말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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