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마루안 2020. 12. 11. 22:00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모레, 라고 너는 말했다
왜 찌푸리며
너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모래 위에 앉는다
왜 하필 나일까

그날은 사람이 많아 외로웠지

두서없는 대화처럼 불쑥 씨가 튀어나오는
작은 복수박을 너에게 준다

흐릿한 연두색 몸피에 옅은 줄무늬
싸인펜으로 진하게 평행선을 그어 봤자
정수리와 배꼽에서 만나고 마는 선

모른 척 해 줘, 너는 말했다
모레에 모른 척 해 줘

조화를 쥐고 있었다

진짜 꽃보다 더 진짜 같아
킬리안 향수를 남김없이 부어 줬다
남김없이 복수박의 표면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나일까

킬리안 향수와 복수박의 관계처럼
이 아픔과 평행하고 싶어

주소도 없이 통증이 몸을 찾아왔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아
모래가 닿는 자리마다 물이 고였다

왜 하필
기다리지도 않고
모레의 모래가 지금 이 자리에 몰아쳤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배영 - 최세라

 

 

광대뼈 안쪽의 얼굴과 치골만 내놓고 떠오른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따라 동그랗게 헤엄친다 양팔을 엇갈려 몸을 꼭 끌어안으면 닫힌 짐승이 되고 차디찬 조약돌을 만들기 위해 여름은 쏟아져 내린다

 

지병의 주장도 사랑과 다를 게 없더라 꼭 너여야만 한다는 것 오래 괴롭히는 사이가 되자는 것 지나간 빗금들이 모여 비가 내린다 세상의 패닉과 무질서와 혀를 조금 내밀고 죽어 있는 검은 개와 빨간 사과와 그보다 더 빨간 배신을 넣고 끓였더니 내가 되었다 세상은 더 무질서해지고 미숙해졌다

 

계속 이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다

너는 시작한다 나의 호흡을

축 늘어진 생일 초를 한 손에 쥐고 노래 부르면

 

내가 일으킨 물보라 끝에 입술을 대고
누군가 자꾸 따라 불러

해피버쓰데이 투 허

 

먼 곳에서 불이 타오른다 무엇을 먹잇감으로 던져줘야 저 불은 사그라들까

 

자정이 되면 물밑에서 동시에 헤엄치며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 최세라 시인은 1973년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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