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런 저녁 - 허림

마루안 2020. 12. 11. 22:10

 

 

그런 저녁 - 허림


투덕적 같은 바다 보자고 동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이거나 슬픔도 한몫했다
한 생이 아름답거나 쓸쓸했다고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간 후였다
노을 뒤에 오는 초생달처럼
어떤 이별 뒤에 오는 사랑은
더 뜨거워지거나 싸늘한 것
그림자 먼저 내안으로 숨는 것
버리고 싶은 내안에 숨은 당신이라는 것
그대 사랑은 일몰이 지나간
서쪽하늘 별로 뜨거나
뒤늦게 찾아온 열망으로 어두워지는 것
우정 동쪽으로 가면서
저무는 수평선 위 구름은 불을 지르고
황홀하게 사그라드는지
그런 저녁
너는 또 무슨 이야기를 밤새 풀어놓는 것인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뭔 맛이래유 - 허림


눈이 온다
오막은 눈이 내려 하이얗게 깊어진다
온 사방은 눈으로 깊어지면
옛날에 옛날에 하던 이야기로 하얗게 밤 새운다
열두 판 뻥을 쳐도 밖은 눈으로 환하다
뒷버덩 지은이가 토끼길을 따라 버덩말 내려와 하루를 논다
굽굽한데 난치나무국수를 할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덩말 엄씨는
굵은 멸치에 막장을 풀어 시래기국 끓이고
방씨와 설설 물이 끓는 지북솥 우에 분틀을 건다
난치나무 갈구 한 대접에 멧옥씨기갈구 열 대접쯤 섞어 반죽을 치댄다
엥간하다 싶을 때 시래기장국 맛이 우러나고
마을 형수들이 반죽 덩이 분틀에 넣으면
헐렁수캐 같은 서넛이 매달려 눌러댄다
미끈덩 가락이 빠지지 못하면 온갖 하얀 농담으로 놀려 먹는다
시내기국내가 소문처럼 동네로 퍼지면
버덩말 이모가 눈을 맞고 들어서고
소식없던 살둔 홀애비도 별일 없냐고 전화가 온다
그러면 백씨는 심이 딸려 분틀 못 누르겠다고 비호처럼 달려오란다
그새 노루하고 곰이 매달려 첫물을 빼
시내기국에 말아 한 그릇 비운다
이 맛을 어디서 보겠노
또 차례를 기다리는데
눈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길을 지운다

참 잘 온다 그지


 

 

*시인의 말

너에게
나는 섬이었다

슬퍼하지 않았을 뿐
행복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은 날들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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