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마루안 2020. 12. 12. 21:48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벽은 등을 돌리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수백 개의 눈을 가졌다는
신화 속 괴물처럼
수천 개의 창문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저 벽 안에는
수백 개의 의자가 있고
수천 번의 욕설을 받아주는
화장실이 있을 것이다

들어갈 것인가
나올 것인가

사람들을 토해내고 삼킬 때만
입을 여는 벽

무엇을 바라 벽이 되었나?
수많은 모서리를 품고 벽 속에
갇힌 벽

벽에서 나온 사람들은 벽을 닮아
무언가 골똘하다

누구나 벽 앞에 서면
벽이 된다

벽 앞에 벽
벽 뒤에 벽

벽이 끝날 때까지
모퉁이로 가자
또 다른 벽을 만나자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도가니집 - 박태건


늙은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장맛비 오는
전주의 오래된 식당인데
식탁은 좁아서 우린 한 식구 같다

혼자 온 사람, 함께 온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양복쟁이, 츄리닝.....
한 그릇의 국밥에 머리를 숙인다
식당의 강아지도 머리를 숙인다

나는 아버지의 수저에 깍두기 한 알을 얹으며
비 내리는 창문에 CT 모니터 속의
어버지의 주름과 갑작스런 나의 실업과
어느새 흘러간 것들을 생각한다

어떤 순간은 기도 같아서
비긋한 좁은 처마 아래
우린 한 식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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