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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씹는 염소 - 조우연

껌 씹는 염소 - 조우연 껌을 씹다가 뺨을 맞아본 사람은 안다 번쩍, 섬광으로 빛나는 외로움의 발화점을 사각의 하악 구조를 한 사람들의 밑바닥에는 쓸쓸이라는 씹던 껌이 쩌억, 눌러붙어 있음도 안다 풀밭의 검은 염소가 몇 시간째 껌을 씹고 있다 반추동물처럼 고독의 고삐에 묶여서 너 역시 몇 시간째 땡볕 아래서 우울거리고 있지 사는 게 이렇게 질기다네, 질겅 슬퍼서 건방져진 표정을 후려 맞아도 멈추지 말아요, 질겅 염소가 입을 오므려 풍선을 분다 팽팽히 긴장한 풍선이 퍽 하고 터졌을 때 너는 그만 어두운 표정을 들키고 만다 들켜버린 표정은 함부로 뱉어선 안 되지 상처는 오래 씹어서는 안 되고 잘 싸서 버릴 것 질겅!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약국(藥國) - 조우연 아픈 자가 이 나라의 일개 서민들이다...

한줄 詩 2021.01.17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 - 한비야.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

여행가 한비야의 책이다. 세계 오지 마을을 여행하며 쓴 책 을 읽으며 참 당찬 여자구나 했다. 이런 여행은 용감하기도 해야 하지만 야물딱진 성격이 아니면 금방 포기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그녀를 바람의 딸이라 불렀는데 참 어울리는 별명이라 생각한다. 글에서 비치는 예감은 이 여자 평생 혼자 살 사람이구나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60세가 되어 결혼을 한 것이다. 남편은 7년 연상의 네덜란드 남자다. 결혼은 했어도 함께 살지는 않는다. 이들 부부가 정해놓은 부부생활수칙은 꽤 특이하다. 이 책에는 두 사람 합의 하에 여러 생활 방식이 있는데 가장 특이한 것이 336 타임이다. 1년 중에 3개월은 남편 고향 네덜란드에서, 3개월은 아내가 있는 서울에서, 한 해의 절반인 6개월은 따로 떨어져 각자 사는 방식이..

네줄 冊 2021.01.17

동성애자 - 이수익

동성애자 1 - 이수익 침묵은 다디단 액체처럼 내 입안을 적신다 아무런 말도 없이 동성애자끼리의 물리칠 수 없는 결함이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가 흘린 침 사이로 당신이 지나간다 연거푸 내가 지나간다 얼굴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시집/ 조용한 폭발/ 황금알 동성애자 2 - 이수익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현재가 있다 그것은 이미 과거로부터 허락 받은, 미래로 나아가게 될 유산 그리고 업적,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를 존중한다 탐미의 눈길로 조용히 바라다볼 것 크고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듯 욕망을 자제하며 당신을 지킬 것 어떤 외부의 침략에도 견고하게 나의 주장대로 벽을 세울 것 우리 둘만의 고통과 기쁨이 넘쳐 올라 외부를 지배해 나갈 것..

한줄 詩 2021.01.16

눈보라 - 박윤우

눈보라 - 박윤우 블리자드, 물 건너온 말씀이다 자음동화가 없이도 보드랍다 바람찬 흥남부두에 흰색 한 소절 섞으면 동쪽이든 남쪽이든 눈보라 친다 제 무게만큼 고요하고 제 너울만큼 바람이 깃을 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눈보라였던, 그 말씀 어디에 가파른 풍경이 도사려서 사납다는 누명을 뒤집어쓰나? 아버지의 술냄새 끝, 누수(漏水) 같은 잠결 속으로 막막한 것들이 막막하게 숨어드는데 지금 창밖에는 기척 없는 소란, 자세히 보면 모두 관절이 없는 것들, 전신이 통점이어서 낱낱이 흰 것들이다 선잠 든 아버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으시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외치시나 숨소리가 내리 엇박자다 전선야곡이 늦은 밤 가요무대를 적신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괄호 - 박윤우 엄마 발톱을 깎..

한줄 詩 2021.01.16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걸려요 길지도 않은 말 잘 할게요 하느라고 한 세월 주름 늘어진 얼굴 낡고 어눌한 모음으로 남은 당신 말뿐일 말 잘 하지도 못한 처음의 말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견뎌냈을까 나는 지금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허울뿐인 사람 자꾸 처음을 기억하며 한 말 또 하고 또 처음을 잊어버리는 신음의 끝은 어디인가 당신의 처음에도 신음이 있었는지요 처음을 자주 기억하던 날도 처음을 자꾸 잊어버리는 날도 당신한테 잘 할게요 그냥 열심히 해볼게요 살 때까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 장설(壯雪) - 허림 막차도 못 타고 터미널 근처 여인숙에 들어 자리 편다 이러저리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뒤척이다가 카톡으로 와 있는 모바일 ..

한줄 詩 2021.01.16

신의 사슬 - 전형철

신의 사슬 - 전형철 뿔에 손이 닿기 전까지 나의 얼굴은 바닥의 소유이니 시간의 틈을 가르는 성상(聖像)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결빙의 바람은 가장 낮은 자의 배후 얻지 못한 몸과 다시 소환할 수 없는 주문(呪文), 끝내 뒤편에 닿지 않아 완성되지 않을 이름에게 매혹의 낱장으로 나누어진 하루를 어떤 무늬로 새겨 넣을 것인가 이편저편의 문을 찾아 꼬리표를 붙이고 흔들리는 빛의 신탁 숨구멍을 파고든 천 개 별 어둠의 심장을 들고 여젼히 그 무엇도 아니어서 나는 이름 이후의 사람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세한도(歲旱圖) - 전형철 몸속의 지류를 더듬는다 흐르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며칠간 금식한 속이 비어 가고 있다 만지기라도 하면 흙담처럼 허물어 내릴 듯하다 물의 길도 허물을 벗을까 속 깊은 체념,..

한줄 詩 2021.01.15

새 - 김인자

새 - 김인자 완전한 고립을 꿈꾸며 사하라사막으로 숨어들었지 사랑에 빠져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지우고 날개가 퇴화되어 새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두 마리 새 두고 온 숲이 그리워질 때면 모래산으로 올라가 서로의 깃털을 다듬으며 흘러가는 구름에게 안부를 전하는 한때는 우리의 사랑도 저 새를 꿈꾸지 않았던가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낙타 등신 - 김인자 낙타는 허공의 붉은 바다를 무장무장 헤엄쳐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지붕도 문짝도 없는 길들이 돌아서면 지워지고 사라졌다 우우~ 낙타가 울었다 현생에 노마드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바람도 지쳐 쉬어가는 천막 속 온도계는 62도를 가리켰다 내 생애 비등점으로 기록될 살아있는 저 시뻘건 눈금 눈금을 확인하는 순간 땡볕에 앉아 눈 한 번 돌리지 않는 낙..

한줄 詩 2021.01.15

대한(大寒) - 김보일

대한(大寒) - 김보일 나의 병을 알고 너는 깊이 울었다 쇄골 근처 너머 눈물 묻은 자리가 따뜻했다 당신이라는 눈물의 온도에 오랜만에 나의 몸이 새집처럼 흔들렸다 방아깨비는 제 몸의 연초록을 어떤 풀꽃에서 옮겨 왔을까 누가 보면대(譜面臺) 위에 어둠을 올려놓았나 어떤 음악이 나무들에게 겨울의 출구를 가르쳐 줄까 스무 개의 발가락으로 질문들을 모으다 꿈도 없이 잠든 칠흑의 밤이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강 - 김보일 언제나 우리가 최후로 닿는 곳 그 너머의 거리가 우리를 출렁이게 한다 내 기억의 강물이 빠르게 방향을 트는 곳에서 내 살던 옛집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늘 아버지 같은 침묵으로만 가슴을 누르던 산은 개처럼 엎드려 우는데 알전구 촉 흐린 옛집 창에 마실 간 누이가 오지 않는 사이 개똥..

한줄 詩 2021.01.15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 김점용 시집

작년인가? 김점용 시인이 아프다는 뉴스를 들었다. 뇌종양 수술을 받고 회복과 치료를 반복하며 투병 중이라는 소식에 시인의 시를 찾아서 다시 읽었다. 내 일기장 같은 이곳에도 여러 시가 올려져 있다. 공감한 시를 저장했다 틈틈히 읽기 위한 곳이 있어 다행이다. 평소에도 연락 오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내가 잘 움직이지 않으니 연락들 또한 뜸하다. 요즘은 지인들 안부 문자보다 재난 문자가 더 많이 온다. 재난 문자 울림이 없었다면 폰이 꺼져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에 외부 활동이 줄어든 탓에 책 읽을 시간은 늘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김점용 시인의 시집 발간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가 구입했다. . 제목이 참 좋다. 투병 중인 시인의 현재 상황을 느끼게 하는 제..

네줄 冊 2021.01.15

북극권의 어두운 밤 - 백인덕 시집

백인덕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을 냈다. 그의 시집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 시인과의 인연은 꽤 되었다. 이 땅의 모든 시인을 사랑하고 싶지만 일면식도 없는 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예찬할 수는 없다. 많은 시를 읽기보다 공감이 가는 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편이다. 영화도 여러 영화를 보기보다 한 감독의 작품을 집중해서 본다. 백인덕 시인도 집중해서 읽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언제부터 읽었을까. 어느 시인의 시집 뒤편에 실린 해설에서 처음 접했을 것이다. 여러 시집에서 그의 발문이나 해설을 읽었다. 주례사 발문이든 쪽집게 해설이든 이 사람은 이런 글 전문인가 보구나 했다. 어디서든 만날 인연은 만나는 법, 헌책방에서 그의 첫 시집을 접했다. 우연히 발견한 , 큰 기대 없이 읽었으나 몇 편 읽으면..

네줄 冊 202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