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의 사슬 - 전형철

마루안 2021. 1. 15. 21:27

 


신의 사슬 - 전형철


뿔에

손이 닿기 전까지

나의 얼굴은 바닥의 소유이니

시간의 틈을 가르는 성상(聖像)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결빙의 바람은

가장 낮은 자의 배후

얻지 못한 몸과 다시 소환할 수 없는 주문(呪文), 끝내

뒤편에 닿지 않아 완성되지 않을 이름에게

매혹의 낱장으로 나누어진 하루를 어떤 무늬로 새겨 넣을 것인가

이편저편의 문을 찾아

꼬리표를 붙이고 흔들리는

빛의 신탁

숨구멍을 파고든 천 개 별

어둠의 심장을 들고

여젼히 그 무엇도 아니어서

나는 이름 이후의 사람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세한도(歲旱圖) - 전형철


몸속의 지류를 더듬는다
흐르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며칠간 금식한 속이 비어 가고 있다
만지기라도 하면
흙담처럼 허물어 내릴 듯하다
물의 길도 허물을 벗을까
속 깊은 체념, 가지런히 벗어 놓으면
한바탕 큰물 져 흘러 갈 수 있을까
썩지도 않고 갈증만 더해 가는 시절을
영글지 않은 풋감을 씹어 먹으며
오래 한 사람을 사랑하고도
몇차례의 발작을 하고도
신강(新疆), 그 끝없는 사막
따귀를 올려붙이던 모래바람을 맞으며
오래 서 있다 알았다
말라 버린 샘 속에서
더듬이를 잃고 맴돌고 있다는 것 모래를 삼키면
선 채로 모래 기둥이 된다는 것
저린 손끝을 중심에 가만히 대 보면
잘 달궈진 불씨가 마른 종이 위에
길을 내며 흐르고 있다는 것


*歲旱圖는 '歲寒圖'의 음차임.


 

 

# 전형철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이 있다. 조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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