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마루안 2021. 1. 16. 21:32

 

 

파킨슨 씨를 만난 날 - 허림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걸려요
길지도 않은 말
잘 할게요
하느라고 한 세월
주름 늘어진 얼굴
낡고 어눌한 모음으로 남은 당신
말뿐일 말
잘 하지도 못한
처음의 말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견뎌냈을까
나는 지금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허울뿐인 사람
자꾸 처음을 기억하며
한 말 또 하고 또
처음을 잊어버리는
신음의 끝은 어디인가
당신의 처음에도
신음이 있었는지요
처음을 자주 기억하던 날도
처음을 자꾸 잊어버리는 날도
당신한테 잘 할게요
그냥 열심히 해볼게요
살 때까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


 

 

 

 

장설(壯雪) - 허림


막차도 못 타고
터미널 근처 여인숙에 들어 자리 편다

이러저리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뒤척이다가
카톡으로 와 있는 모바일 부고장을 연다

문자로 정리된 세상이
유서처럼 떠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죽었지

사랑도 사람도 깃드는 생물이어서
떠나와 돌아보면 그립고 눈물 나는 일이네

눈 위로 걸어간 발자국만 선명하다

 

 

 


# 허림 시인은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거기, 내면>, <엄마 냄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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