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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잔설(殘雪)처럼 - 김재룡 끝 종소리와 함께 힘차게 날아오르며 세단뛰기를 하던 아이들이 신발 속으로 들어간 모래를 털고 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오르던 아이들도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털고 있었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몇몇 아이들이 바구니에 공을 주워 담고 있었다. 차디찬 한 올의 모래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아이가 두고 간 초록색 체육복 윗도리가 축구 골대 위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늘 장사도 이렇게 끝났군. 뒤따라온 한기가 어깨를 짚었다. 성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 눈부시던 한 시대가 그렇게 갔다. 키 큰 나무들이 들어찬 숲이거나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진 들판이거나 흐린 시선 맞닿은 아무데서나 몇 조각의 외로움들 뒹굴고 있다 언제나 열외에서 서..

한줄 詩 2021.02.22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선인장, 마흔 근처 - 전인식 잠깐 졸았을 뿐인데 눈 떠보니 사막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길인지 희미하다 분명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서너 개의 보따리들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짐 싣고 갈 낙타는 꿈속에 보았던 동물 밤하늘 별빛 해독할 점성술을 익혔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갈 오아시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러기 날아가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알 수가 없다 바람이 등 떠미는 쪽으로 가면 행운이라도 따를까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미리 사막 건너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여태 정신 팔고 다녔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호수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흘렸던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절하..

한줄 詩 2021.02.22

잠 못 드는 밤 백석의 시를 생각하며 - 김상욱

스물이 훨씬 넘도록 내가 아는 시인은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 전부였다. 읽은 시라고는 윤동주와 한용운, 서정주의 시였다. 군대에서 만난 선배 덕에 시인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때 선배가 읽던 황동규, 오규원, 황지우 시집을 처음 접했다. 감동은 별로 없었다. 그냥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시인들의 지적 허영심 정도로 읽었다. 그 선임과 나는 성격은 이질적이나 어딘가 맞는 구석이 있었던지 늘 보초도 같이 서면서 곧잘 어울렸다. 진중하지 못하고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나에 비해 그는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 담고 있는 듯 언제나 고뇌에 찬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그때 감염된 시 바이러스가 지금의 시 읽기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당시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였던 시였지만 내 몸 어디쯤에 숙주로 남아 있다 훗날..

네줄 冊 2021.02.21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사랑의 뒷면 -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외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컬러풀 - 정현우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었다. 멸치의 눈이 친구의 눈빛 같았다. 땅거미가 사람들을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한 가윗날 소리, 노을 ..

한줄 詩 2021.02.21

정처(定處) - 정일남

정처(定處) - 정일남 내가 없으면 나를 에워싼 만물은 의미가 없다 내가 있을 때 꽃은 피고 과일은 익어 굴러온다 나비는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 나를 에워싸고 말을 걸어오던 부지기수들 나와 관계를 끊고 사계(四季) 밖으로 갈 것이다 미세물질은 허파를 갉아먹는다 몸의 반은 이미 흙으로 읽히고 두뇌의 반은 해골로 읽힌 지 오래 봉분에 바람꽃이 피어 손짓하게 되면 만 리 밖에서 무덤새는 날아와 꽃그늘에서 졸다 갈 것이다 마음속엔 동혈에서 흘러온 강물이 혼탁한 도시를 가로질러 간문(間門)을 흘러가게 될 것이다 *시집/ 밤에 우는 새/ 계간문예 무진 일기​ 1 - 정일남 문득 삼십 년 전으로 올라가 본다 민중시를 반 지하방에 엎드려 읽다가 어느 필화 사건에 휘말린 서정 시인이 아내가 떠나고 폐인이 되었다는 뉴스 홀..

한줄 詩 2021.02.21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낙타는 어제의 지도를 허물면서 간다 - 신표균 나침반이 가리키지 못하는 사막의 길을 내비게이션은 손짓할 수 있을까 목마른 낙타 한 마리 오아시스 찾아 사막 속을 간다 눈썹에 매달리는 모래바람 마른 울음으로 헤치며 발걸음 다시 내딛지만 모래 속에 파묻힌 길이 어디로 닿아있는지 돌아갈 길 막막한 길 위에 서서 길을 묻는다 날개 부딪히는 일 없을 철새 떼가 날아가는 길 없는 그곳이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눈엔 지도가 없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자정의 종소리는 종종 징징거린다 - 신표균 둥지도 무덤도 만들지 않는 눈먼 떠돌이 새들 동물원 안에 갇힌 매의 노란 눈에 놀라 검은 나비처럼 내 과거를 매장해 놓은 언덕 위를 날아다닌다 틀니 달그락거리는 소리 잦아든 귓속에서 자라는 침묵 아버..

한줄 詩 2021.02.21

건너 간다 - 이인휘

읽을 책은 언젠가는 읽게 되는가. 드물지만 그렇다. 3년 전부터 읽겠다고 찜해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었다. 집콕을 해야만 했던 설날 연휴 덕분이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맘 먹고 이인휘 소설을 연이어 읽었다. 소설을 잘 안 읽기에 이것도 드문 일이다. 워낙 파란만장한 날들을 제압하며 살아왔기 때문인가. 웬만한 이야기는 다 시시하다. 이인휘 소설 다섯 권을 호떡 포개듯 책상 모서리에 쌓아 놓고 보니 읽기 전부터 배가 불렀다. . . , , 그리고 얼마 전에 나온 신작 이다. 폐허를 보다는 경어체 소설이라 몇 페이지 읽다가 일찌감치 접었다. 나는 희안하게도 경어체 문장을 읽지 못한다. 참으며 읽는다 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인휘 소설은 미사여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네줄 冊 2021.02.18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까다로운 방문객 - 김점용 묘지의 저녁이다 서둘러 청소를 할 시간 단청 꽃이 다 진 크고 낡은 집을 깨끗이 쓸고 또 닦아야 한다 어두워지면 발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집 오늘은 특별히 세 자매가 온다네 큰언니는 팔자를 그리며 나란한 무덤 두 개를 함께 돌자 그러고 둘째는 건넌방으로 사주를 보러 가자 자꾸 조르겠지 막내는 철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거야 저... 저기요, 당신 신발이 없어졌어요 찾아주세요 무엇이 잘못됐는지 밤늦도록 불은 켜지지 않고 혼자 빈 구석방을 오래오래 문지르면 사라진 꽃신들이 고요히 돋아나지 살아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비, 구름의 장화 - 김점용 밖에 좀 보거라 어젯밤에 너가부지가 마른 솔갱이를 한 짐 지고 안 왔드나 엊그제 커다..

한줄 詩 2021.02.18

일몰 - 함명춘

일몰 - 함명춘 일몰 직전이다 힘차게 뛰던 파도의 맥박이 조금씩 잦아들고 잠시 숨을 고르는 새 떼들이 허공에 못이 되어 박힌 채 지나왔던 길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참 탈도 많았던 길이었지 삶은 누구나 미처 다 읽지 못한 아픔의 책 한 권씩은 갖고 있는 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하루에서 돌아온 물결들 하나둘씩 세상에서 가장한 편안한 잠을 준비하고 떠난 줄 알았던 적막이 그리움을 향해 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수평선을 넘어온다 파도의 숨이 뚝 하고 끊긴다 일몰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초심처럼 입술을 깨물며 별이 뜨고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다짐하며 바람이 분다 이제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의 핀셋에 꽂혀 곤충처럼 버둥거리는 나를 그만 용서해 줘야지 이미..

한줄 詩 2021.02.18

가장 먼 길 - 이산하

가장 먼 길 - 이산하 ​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바닥 - 이산하 ​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 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

한줄 詩 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