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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슬픔을 부르는 저녁 - 문신 오늘 저녁은 낡은 상자를 내려놓듯, 다만 다소곳한 노래가 되어 세상에 주저앉는다 상자는 유월의 평상에 나앉은 사람처럼 선과 면의 각오로 저녁에 기대었고 건너편에서 까닭 모를 아픔처럼 어린 사과나무의 그늘이 침침해져 간다 그러니 상자에는 상자의 내력이 어둠에는 어둠의 내력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슬픔에는 슬픔의 내력이 있다는 말을 누가 이 저녁, 캄캄해져 오는 바람의 찬란한 침묵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먼바다에서 저녁을 맞이하는 일처럼 우리의 상자는 그렇게 낡아 간다 바다라니 ...... 노래의 침묵처럼, 그 침묵에 벗어 놓은 신발처럼, 저녁이 가지런하게 건너올 때 그 주춤거리는 걸음을 마중하는 처마 끝 흐린 등불 같은 심정으로 캄캄한 슬픔이라고, 손에 닿는..

한줄 詩 2022.07.21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근본 없다는 말 - 김명기 마당가 배롱나무 두 그루에 꽃이 한창이다 한 그루는 장날 뿌리째 사다 심었고 한 뼘쯤 더 자란 나무는 가지를 베어 꺾꽂이했다 뿌리째 심은 나무는 사방 고르게 가지를 뻗어 꽃 피우고 베어 심은 것은 뿌리내리며 가지를 뻗느라 멋대로 웃자랐다 그중 제일 먼저 뻗은 가지는 땅을 향해 자란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을힘 다해 살았겠지 기댈 데가 없다는 건 외롭고 위태롭다 죽을 수가 없어 죽을힘 다하는 생 뿌리가 얼마나 궁금했으면 아직도 땅을 향해 자라날까 무심코 내뱉는 근본 없다는 말에는 있는 힘 다해 뿌리내리며 허공을 밀어 올리는 수없는 꺾꽂이 같은 삶이 깊숙이 배어 있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닮은 꼴 - 김명기 떼던 화투점 밀치고 잠든 늙은 엄마 발을..

한줄 詩 2022.07.21

가시나무를 씹는 이유 - 김용태

가시나무를 씹는 이유 - 김용태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자식 같은 새파란 것에게 이유 없이 삿대질, 욕을 먹고 치밀어 오르는 분에 어디 밥 빌어 먹을 데가 여기 뿐이겠냐고 호기롭게 사표를 내던지고 나오자 최씨, 쓴 커피를 타 건네며 어지간하면 참고 견디어 보라면서 의자를 내민다 주저앉은 경비실 한쪽 화면 속에는, 낙타 한 마리 말라비틀어진 다리 사이에 불어 터진 젖통을 매달고 억센 가시나무를 씹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 낸 상처에서 비어져 나오는 뜨거운 것을 목구멍 뒤로 넘기는 것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아 죄 없는 짐승의 선한 눈이라니 그러다 문득, 사막 저편에서 굶주려 애타게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날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돌이 떠올라 접시꽃 피어 환한 관리소 쪽으로, 자꾸 자꾸만 눈이 가는..

한줄 詩 2022.07.20

그림자 무사 - 조온윤

그림자 무사 - 조온윤 나를 대신해서 명랑하게 살아줄 그림자를 찾습니다 나에게는 실체랄 게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거든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주어서 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내일의 일들 따위 잊어버리고 내일모레의 일들 따위 전부 잊어버리고 그림자는 나를 대신해서 친구들을 만나 하하호호 농담을 주고받았다 주말에는 낯선 애인과 영화도 봐주었다 되풀이되는 말싸움도 대신 해주고 사랑이고자 하는 게 곧 사랑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살아주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았던 거 같지만 그림자야 진심이고자 하는 게 곧 진심일 수 있다면 가짜였던 마음은 언젠가 펄떡이는 심장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거기에 없어도 밤이면 거리는 어두컴컴해지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는 걸 안..

한줄 詩 2022.07.20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불모에서 별을 보며 울다 - 류흔 잊지 못하는 것은 잊을 수 없다 잊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이 처음에서 시작되듯 마지막 순간에 처음이 들어왔다 시간은 가로 건너는 풍경, 심장을 누르는 가벼운 공기들 중력이 없으니 수심(愁心)도 없으리 옆으로 깊어지는 숲으로 황혼이 안개처럼 깔릴 때 처음으로 마지막이 시작되었네 이런 벌판에 별은 곤란하므로 별이 박이기 전에 분위기를 사수(死守)해야 해 오늘은 어둠이 있었고 별이 떴다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눈물이 흘렀지만 별에게 쏘아 올릴 총신(銃身) 한 그루 없는 불모지에서 나는 그만 중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총체적 슬픔 - 류흔 이 밤에 무얼 생각해야 했을까 달이 게워논 따뜻한 토사(吐瀉)를 밟으며 ..

한줄 詩 2022.07.19

좋았던 옛날 - 정덕재

좋았던 옛날 - 정덕재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나이 든 할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고 폐지를 쓸어 담는 젊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오일장 좌판에서 다듬은 파 두 바구니 시들까 우산 하나 받쳐 놓은 할머니가 오이 가지 호박 부추 대파 쪽파 감자 양파 브로콜리 양배추 박스 열 개를 펼쳐 놓은 젊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의사 아들이 건물을 지었다고 자랑하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다음 날 석션은 언제 하냐고 묻자 찡그리며 기저귀를 갈던 나이 든 간병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고단하게 살다 보니 목숨줄이 더 모질어졌다며 송대관 노래처럼 해 뜰 날이 올 줄 알고 고단해도 견뎠..

한줄 詩 2022.07.19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 이명선 시집

시를 읽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첫 시부터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집이 넘쳐 나는 시대에 이런 시라면 얼마든지 읽어줄 수 있을 텐데,, 은 이명선의 첫 시집이다. 누구든 그러겠지만 첫 시집을 낸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릴 것인가. 시집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문장 완성하기 위해 참으로 긴 날들을 지새웠을 것이다. 싯구 곳곳에서 그걸 저절로 느끼게 했다. 이렇게 시를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부러움과 함께 묘한 질투심이 생긴다. 내가 시를 쓴 적은 없지만 참 오랜 기간 시를 읽었다. 해서 어떤 시집이든 몇 줄 읽으면 바로 느낌이 온다. 시를 잘 쓰는지, 억지로 쥐어 짰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시인지까지 읽어낼 수 있다. 물론 틀린 예감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한 ..

네줄 冊 2022.07.19

실업의 무게 - 서화성

실업의 무게 - 서화성 어제는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하늘에서 햇볕이 쏟아진 날 윤슬을 본 지 오래다 식탁의 거리는 급여일과 좁혀지지 않았으며 식탁에서 말의 간격보다 멀어져 있었다 며칠째 콩나물국과 말라버린 콩나물무침이 전부였고 김이 빠진 쉰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다 탈색이 된 회색 작업복은 일용의 본분을 다했는지 소금꽃이 피어 있었다 한때 통장 서너 개가 배불러 있던 시절, 하루걸러 밥 먹자던 사람은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 떠나기 시작했다 돌탑처럼 쌓여 있는 이빨 빠진 그릇들 꾸역꾸역 헛배에 두꺼운 벽지를 바르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에 오래된 빵집에서 허기가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해남부선을 타면 내가 두고 온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실어증을 앓는 사람처럼 바다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주절주절 ..

한줄 詩 2022.07.18

사막 - 신동호

사막 - 신동호 서편으로 가는 동안 이별이 다가온다 사막은 깊고 멀어야 한다 별이 내려 작은 모래와 살을 맞대고 지나온 기억들은 반짝인다 부르카가 흔들리지 않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느린 걸음 내가 낙타였을 때, 사막의 밤은 우주 저 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라비아의 공주는 앞으로 뒤로 내 걸음의 리듬을 맞춰주었다 초승달 같은 눈을 만나면 지금도 나는 허리가 아프다 저녁을 향해 걷는 동안 나는 늘 모래처럼 작아졌다 모래 언덕이 수세기를 건너왔으나 지금도 모스크로 총총, 멀어져가는 사랑 모든 신들은 사막에 산다 목마른 자들만이 신들을 추억한다 숨을 곳이 없는 자들만이 죽음을 마주한다 심연이 이내 신들이 되곤 했던 그곳 걸음들이 깊은 발자국만큼 겸솜해지곤 했던 사막 끝, 그곳 어디 *시집/ 그림자를 가지..

한줄 詩 2022.07.18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순간을 지르는 순간 - 박봉준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추락하는 새의 날갯짓이 더 매혹적인 순간을 안다 난간 끝에 서 있는 모녀의 두려움은 이미 허공으로 날리고 죽음을 앞세우고 저토록 진지한 생을 그려내는 모습이 나는 부끄럽다 서천의 붉은 구름이 그녀에게 속삭였지 생은 지나가는 바람이야 죽음은 가장 쉬운 방정식 번지점프대 위에 선 피에로 불신의 고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를 웃게 하지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난간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정말 마지막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다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피고 지고 - 박봉준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보니 죽는 건 순식간이라는 말, 허언이 아니었네 채 꿈도 꾸지 못한 순간이 수술실 밖에서는 어느 한 생이 가장 긴 강으로 흘러 수없이 솟구치고 잠겼..

한줄 詩 2022.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