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 이명선 시집

마루안 2022. 7. 19. 21:46

 

 

 

시를 읽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첫 시부터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집이 넘쳐 나는 시대에 이런 시라면 얼마든지 읽어줄 수 있을 텐데,,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은 이명선의 첫 시집이다. 누구든 그러겠지만 첫 시집을 낸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릴 것인가.

 

시집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문장 완성하기 위해 참으로 긴 날들을 지새웠을 것이다. 싯구 곳곳에서 그걸 저절로 느끼게 했다.


이렇게 시를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부러움과 함께 묘한 질투심이 생긴다. 내가 시를 쓴 적은 없지만 참 오랜 기간 시를 읽었다.

 

해서 어떤 시집이든 몇 줄 읽으면 바로 느낌이 온다. 시를 잘 쓰는지, 억지로 쥐어 짰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시인지까지 읽어낼 수 있다.

 

물론 틀린 예감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한 편의 시나 몇 줄의 싯구에서 점쟁이처럼 감지해낸다. 시에서만큼은 나는 작두 타는 무당의 신기에 가까울 만큼 촉이 발달했다.

 

내 인생에서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시를 읽는 내공이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낭비가 심했던 인생이기도 하지만 참 경제성 없는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이런 시집 읽을 때 행복함이 가득차는 것을,, 시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시 한 편 올린다.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나의 이야기로 나는 흥건한 바닥이 되었다

고시를 치를 생각 없이 고시원에 있었다 공직자처럼 공개할 재산이나 공제할 가족이 있었다면 고사했을 것이다

열대야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물수건을 올리고 느린 밤을 밝히듯 삶의 낱장을 뜯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면

엎드려 자다 목마른 얼굴로 일어났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언뜻 마주칠 수만 있었다면

흥건한 바닥에 배설된 우리가 떠다닌다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는 우리의 이야기는 작은 소란에도 불시에 솟구치려는 간헐천 같았다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우리의 회고록을 쓴다면 공수래공수거라고 써야 할까 공공의 적이라 써야 할까

검은 마스크로 가린 칸칸의 방은 타 버린 낱장만큼 캄캄하고 우리는 그 흔한 연고도 바르지 못하고

없는 만큼만 없었으니 잃을 만큼만 잃어버린 우리의 영결식에 우리가 없어

한 사람씩 배웅하기 위해 마지막 불이 사그라지기 전 연고 없는 사람끼리 무기명 투표를 한다

오늘은 이 고시원에서 저 고시원으로 이주하기 딱 좋은 날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