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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 최백규

안식 - 최백규 해변에서 깨끗한 하복이 마르고 있었다 하얗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칠이 벗겨져도 썩지 않는구나 손을 모아 죽지 않는 행성을 만들었다 폭설을 떠올려도 하품할 수 있는 절기였다 그러나 눈을 감고 바람을 맞을 때마다 너의 울음소리가 밀려왔다 이것을 포옹이라 불러도 될지 오래 고민했다 언제쯤 나를 멸망시켜야 하나 걱정되었다 더는 새장을 씻길 이유가 사라져도 욕실에 웅크려 앉아 샤워기를 쥔 마음으로 모래만 털다가 부스러진 날엔 잠든 너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도저히 눈물이 잡히지 않아서 저 세계에서는 내가 죽은 역할이구나 이해했다 눈처럼 재가 날리는 곳에 닿으면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 고개 숙인 모두가 손바닥을 적시는 사이 그들의 행성을 훔치고 싶어졌다 유..

한줄 詩 2022.08.02

저물녘의 운산 - 변홍철

저물녘의 운산 - 변홍철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는 대출이자는 참 꼬박꼬박 나간다 꼬박꼬박 내가 지불할 이자를 알려주는 저 근면한 세상의 파쇄기에 옷자락이 말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그대도 나도 오늘 충분히 투쟁하였다 이제 가족들이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며 인색하게 묻혀 올 신선한 바람을 찬거리 삼아 어두운 불을 켜고 밥상을 다시 차릴 시간이다, 1954년 김수영의 '나의 가족'은 지금 그대와 나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을 겪은,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런 건 표절이 아니다 아직 나에겐 두 병의 막걸리가 남아 있다 아마 금요일까지 남겨놓긴 어려울 듯하다 꼬불치지 말자, 절약하지도 저축하지도 말자, 새로운 날들에는 새로운 술이 반드시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없이 어떻게 사랑의 모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랴 *..

한줄 詩 2022.08.02

모서리 - 서화성

모서리 - 서화성 어딘가 모르게 모가 난 사람은 아프거나 슬프다고 말한다 한때는 모가 난 사람이라고 유행가처럼 싫어한 적이 있었다 그런 모가 서리를 만나면 모서리가 되었고 그런 모서리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혹독하다는 말처럼 슬펐다 모서리는 사랑받지 못한 둘째 같은 것 모서리는 자식을 기다리는 우리 엄마 같은 것 살짝이라도 멍이 들면 아프기 때문이다 뾰쪽할수록 더 아프고 슬프다는 것 모가 난 사람은 한 번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고 뜨거운 고백 하나는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은 마음 한구석이 장작불처럼 슬플 것이다 *시집/ 내 슬픔을 어디에 두고 내렸을까/ 시산맥 낮잠 - 서화성 gs 편의점 옆, 삶에 짓눌려 낮잠을 자는 노인이 있다 간혹, 햇볕을 쫓아가는 봄날처럼 길 건너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

한줄 詩 2022.08.01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 강회진 도시서 지내다가 가로등 드문드문 마동 마을에 들어오면 먼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순하고 착해지는 것 같다 먼 미래에 가 있는 것 같다 아무렴,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걸 지켜볼 수 있지 이른 새벽 마당 몰래 쌓이는 눈 지켜볼 수 있고 건너편 거대한 숲 흔드는 바람소리 들을 수 있으니 착하고 순한 건 연약한 걸까 강한 걸까 혼잣말하다가 마당에 어둠이 내리면 제일 먼저 씩씩하게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적당히 불길이 사그라들면 그 불이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낸다 옷에서 불 냄새가 났다 오래전 불 때 밥하던 늙은 어미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연습의 시간들 일테면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에 적응하는 중이다 그것도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시집/ 상냥한 인생..

한줄 詩 2022.08.01

티눈이 자란다 - 양아정

티눈이 자란다 - 양아정 어떤 사람에겐 터널이 누군가에겐 지름길이다. 계단이 납작 엎드려 공황장애를 앓고 바람은 계단의 꼭대기에서 춤춘다. 먹구름을 배달한 까치들 조명 꺼진 터널을 지나가는데 셔터를 내린 그의 눈은 아직 겨울이다. 아무도 그의 벨을 누르지 않아 봄빛은 창을 두드리는데 날 선 불안은 손발을 창밖으로 자꾸 던져버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먼지들의 임대료는 벚나무 옆 싱싱한 포커레인이 독촉한다. 뒷모습뿐인 거울 소파가 침대가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불황과 공황을 오독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낙서가 이 벽 저 벽 뛰어다닐 때 벚꽃의 공약은 일용직 잡부를 재배할 거라는 촉지도 이건 서막에 불과할지도 아무도 모른다. 흰 달은 셔터를 두드리는데 *시집/ 하이힐을 믿는 순간/ 황금알 나..

한줄 詩 2022.08.01

여름방학 - 박은영

여름방학 - 박은영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 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시집/ 우리의 피는 ..

한줄 詩 2022.07.30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장소 신파적 - 이용훈 산자락 온기 찾아 모여든 집들 벌어진 틈에 풀칠 걱정 잊으려 해도 근심은 달빛 쬐는 산맨치로 그림자 짙게 얼굴들 덮는다 덮는데 뿌리박는 것은 그런 것인가? 돌바위에 난생으로 긁힌 살결 달 참 밝은데 얼룩 한점 없네, 없어서 계단 내려가는 아이 거친 숨에 볼 금세 빨개지고 소학교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미음.. 읽고 나면 그만 마쳐도 괜찮다 해서 부둣가 하루떼기 하역으로 막내새끼 시작했네 시키는 거 하라는 거 나서는 거 말리는 거 시린 거 아린 손 마디마다 후— 불년 따끔 찌르던 손은 피딱지 피어나고 지고나면 배 타고 그물 까는 어부도 해보겠다 했지 그래야만 해서 살아나는 것은 물때 맞춰 나가고 오가는 거라 했네 파도에 온몸 얻어터지니 지켜보던 보시더니 남해 바람은 만신창이로 ..

한줄 詩 2022.07.30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벽도 창공이 될 수 있다고 못은 생각했다 - 이윤승 머리통이 견고한 못은 노래가 되지 못한 노래를 부르며 단련되었다 꽉 조이며 맞물리던 시간에서 못은 얼마나 단련되며 길들여졌나 흰 벽을 우듬지라 믿으며 걸어놓은 빨간 모자가 열매인 줄 알고 쪼아 먹으며 후렴구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며 웅덩이 빗물처럼 벽안에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흐르는 물처럼 때로는 경전처럼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으면 벽이 창공이 될 수 있을까 자목련 서 있는 꽃밭으로 눈길이 간다 나무 어깨에 이마에 박힌 자줏빛 꽃송이들 바람이 망치질을 할 때마다 나무를 빠져나온 꽃잎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처럼 창공으로 날아간다 먼 눈빛으로 사람들이 벽이라 느낄 때 못은 꽃잎처럼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그 너머로 마음껏 날아가고 있는..

한줄 詩 2022.07.29

여기에서 - 황현중

여기에서 - 황현중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 오늘을 잊지 않기로 한다 두근두근 오늘을 떠나지만 지친 발걸음이 쉴 곳은 애오라리 여기뿐 작은 죄가 늙은 어미의 품에 안기고 열두 줄 가야금의 현을 누르듯 슬픈 사람들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여기에서 하루의 후회를 정갈하게 다듬어 일기장 안에 눌러 쓰고 떠오르는 눈썹달 바라보면 저절로 솟는 쓸쓸한 미소 같은 오늘을 가득 사랑한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다시 돌아와야 할 여기까지 나를 생각하고 너를 그리워한다 세상 안에 온몸 부린다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길바닥 - 황현중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날마다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길바닥이 길바닥 모퉁이에 핀 개불알꽃이 예쁜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옆구리에 ..

한줄 詩 2022.07.29

보리밥 그릇에 사람이 있네 - 오창근

좋은 산문집 하나를 읽었다. 오창근이 쓴 다. 유명 작가는 아니다. 작가라기보다 교육자라고 해야겠다.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강사를 10년쯤 하다 몇 개의 직업을 거쳤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과 비슷할까 하는 대목이 수두룩해서 놀랐다. 베스트 셀러 같은 유명 책보다 숨어 있는 책을 발굴해 읽는 것이 내 책읽기의 목적이기에 그걸 제대로 달성한 것 같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디 여행 갔더니 풍경이 너무 좋았다. 맛집 가서 맛난 것을 먹고 행복했다는 등 흔히 수필집에 나오는 일상이 이 책에는 없다. 부모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신이 겪어온 날의 단상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 안에 쌍둥이처럼 내 가족의 삶과 내력이 들어 있다. 작가는 8남매 중 일곱 번째인데 여..

네줄 冊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