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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 류시화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 류시화 내 마음속에 머무르는 새여 네가 나를 아는 것만큼은 누구도 나를 알 수 없다 너는 두려움과 용기의 날개를 가졌으며 상실과 회복의 공기 숨쉬며 날것인 기쁨과 슬픔에 몸을 부딪친다 너의 노래는 금 간 부리가 아니라 외로운 영혼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희망의 음표를 잃지 않는 내 마음속에 머무르는 새여 내일 네가 어느 영토로 날아갈지는 내가 생각할 일이 아니라 신이 결정할 일 삶이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해하지 않으련다 삶이 남기고 가는 것도 삶은 전부를 주고 그 모든 것 가져갈 것이므로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나는 이따금 나를 보며 경이로워한다 - 류시화 나는 이따금 나를 보며 경이로워한다 어떻게 이토록 ..

한줄 詩 2022.08.11

첫맛과 끝맛 - 성은주

첫맛과 끝맛 - 성은주 입 안 가득 번지는 팽팽한 길을 더듬는 그 맛이 나를 키워 냈다 엄마 젖꼭지에서 하얀 피가 돌던 날 눈물이 핑 돌던 날 첫맛은 항상 나를 달게 위로했다 밀어내도 게워 내도 맛이 맛을 찾아가듯 아득한 냄새에 침이 고였다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먹을 때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럴수록 맛은 더 깊어졌다 비릿한 저녁이 저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해 장마를 기다렸다 * 눈 뜨면 지극히 평범한 맛 짜내도 짜내도 단물 빠진 껌처럼 함부로 버려진 그릇에 금이 갔다 엷은 통증이 줄 타고 흐르는 날 먹으면서 숨 쉬는 엄마를 봤다 옆에서 나는 매운맛이 당겼고 맛없는 것들을 죄다 뱉어 냈다 살갗 깊숙이 식어 가는 엄마를 뒤집고 뒤집어도 자꾸 식어 가는 푸른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면 엄마의 끝..

한줄 詩 2022.08.10

커피 - 박용하

커피 - 박용하 지상에서 마시는 겨울 커피 한 잔 혼자 노는 데 타고난 커피 한 잔 검은 눈물이라고 그랬나 너는 4만 킬로미터를 간다 너를 자주 찾던 그는 비 내리는 가슴을 지닌 길을 아끼던 나무 인간이었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삶이 되살아났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검은 시간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마시며 슬픔의 바닥에서 젖는 비의 얼굴을 본다 그에겐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때때로 이 비루한 거리에서 한 잔의 커피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저녁을 찌르는 술 한 잔과 지상을 떠나가는 맛으로 담배 한 대를 더하고 싶었을 게다 그는 외롭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마로 만나는 사람이었다 고개 돌리면 얼음 사회가 버티고 서 있었다 삶은 대책이 없었고 죽음은 어찌할 줄 몰랐다 지상에서 마시는..

한줄 詩 2022.08.10

목마름에 두레박 내리는 - 배임호

목마름에 두레박 내리는 - 배임호 젊을 때는 시간이 기어간다고 나이 들면 시간이 날아간다고 이래도 투정 저래도 투정 투정 소리 듣기 싫어 가던 길 멈추고 싶어도 그저 묵음으로 동녘을 바라보고 달리는 것은 그대를 향한 사시사철 목마름 우물 속 두레박을 내리는 사랑 때문 *시집/ 우리는 다정히 무르익어 가겠지/ 꿈공장플러스 온 세상이 내 품에 - 배임호 내가 세상을 미워할수록 세상은 나를 멀리하고 내가 세상을 보듬어 줄수록 세상은 나를 가까이한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눈 한번 크게 떠서 말 많고 탈 많은 세상 한번 허리 굽혀 안아주니 온 세상이 내 품에 머무는구나 # 배임호 시인은 1957년 무주에서 태어나 농촌의 정겨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고등학교부터 서울 도심의 역동적인 삶의 현장을 체험하..

한줄 詩 2022.08.09

가을 근방 가재골 - 홍신선 시집

요즘 홍신선 시집에 푹 빠져 지냈다. 워낙 이 시인이 서정성 짙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곧 팔순에 접어들 나이가 되어선지 세상을 달관한 듯한 싯구가 인상적이다. 이 시인은 나이 들수록 나와 궁합이 잘 맞는다. 예전에 읽은 젊을 적 시보다 근래에 발표한 시가 훨씬 공감이 간다. 왜 팔팔할 때 시가 아닌 노년의 싯구에 마음이 가는 것일까. 어쩌면 슬픔을 관조하는 각도가 달라져서일 것이다. 내가 푹 빠진 제목처럼 늦가을 오후의 햇살같이 점점 사그러지는 노년의 일상이 은은하게 가슴에 파고든다. 어느 것이 본래면목인가 - 홍신선 갇힌 방 창턱에 두 손 포개 올린 채 넋 놓고 내다보는 초겨울 빗속 이즘 김장밭 무 밑드는 소리에 귀도 깨진 환히 살 마른 늙정이 초개(草芥) 하나 빗발들 사타구니에 고개 쑤셔 박은 채 서..

네줄 冊 2022.08.09

그때, 오이지 - 박위훈

그때, 오이지 - 박위훈 자귀나무 꽃그늘에서 찍은 가족사진처럼 짜디짠 가난이 서로를 옭아매 두었던 흑백사진이다 골마저 허옇게 낀 독 안의 염천(炎天) 단칸방, 쉰내 나며 부대끼던 내 키만 한 옹기그릇이다 감자며 옥수수 삶아 멍석에 둘러앉았을 때 무짠지와 빠지지 않던 저녁 두레밥상이다 누름돌 괸 오이지 쑤석이며 닳은 손끝으로 간을 보던 쭈글쭈글한 어머니의 아린 손이다 비칠비칠 빈손뿐인 나, 늘 낮은 곳에서 살갑다 꼬리 치며 괴던 댓돌 밑 누렁이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는 여름도 한걸음 쉬어가는 찬밥 한 덩이다 *시집/ 왜 그리운 것들만 더디 바래지는지/ 상상인 허물이라는 허물 - 박위훈 여름의 짧은 문장은 뾰족한 염천을 내딛는 울음의 한때 허공의 우듬지를 흔드는 건 매미 지루한 반복음을 해석해 듣..

한줄 詩 2022.08.08

초원 - 하상만

초원 - 하상만 더 이상 달아나지 않고 토피 무리가 먹혀 가고 있는 동료를 바라보고 있다 하이에나는 검은 주둥이를 깊숙이 집어넣고 먹이를 물어뜯고 있다 토피들은 안다 하이에나가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는 것을 동료가 죽는 동안 안전하다는 것을 얼굴을 든 하이에나가 동료의 얼굴에 범벅이 된 붉은 피들을 혓바닥으로 핥는다 서로를 닦아 주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먹고 있다 토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까 내가 아니니까 오늘도 무사하니까 약자들의 수는 언제나 더 많지만 소수를 이기지 못한다 모여서 달아나기만 한다 모여서 몰아내지 않는다 동료의 마지막 피까지 핥고 있는 하이에나를 보면서 자연스러운 거라고 자연은 변하는 법이 없다고 체념한다 초원의 청소부 독수리가 날아와 남은 음식을 먹는다 *시집/ ..

한줄 詩 2022.08.08

몸, 덧없는 몸 - 홍신선

몸, 덧없는 몸 - 홍신선 인간은 베잠방이 방귀 새듯 가뭇없이 사라지고 뭇 기관 허물어진 짐승인 몸만 그렇게 덧없는 몸만 남았다. 오냐 오오냐 말 안 해도 네 마음 다 안다고 낮은 소리 건네던 향로의 다 탄 무연향(無煙香)이 무시로 떨어져 내리고 밤 이슥해 나와 본 영안실 밖 내 등 뒤 하늘에는 옆구리에 소변 주머니 달고 곡기 끊은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잠 깬 구름 하나 떴다. 그 멀지 않은 곳 마침 열여드레여서 누군가 먼 길 채비로 잘 닦아 꺼내 논 신발 한 짝이 유난히 환하다. 그동안 궂은일 다 거두어 간다는 그동안 뭇 인연들 고맙다는 그니가 마지막 머무는 이승.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낮달이 뜨는 방식 - 홍신선 살아서 사람들의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철벙철벙 물탕 튀며 건너뛰었던 ..

한줄 詩 2022.08.03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어느 노인의 예감 - 부정일 할멈, 당신이 팔순 넘겨 오라는 당부 때문에 빈자리 옆에 누워 자고 일어나기가 지루했는데 팔순은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는데 할멈 죽고 이 년이던가 하나 남은 막살이를 아들에게 증여할 땐 나, 먼 길 갈 때까지 막살이에서 할멈이 두고 간 것들 만지다가 어느 날 조용히 따라가리라 생각했었네 객지 나간 아들이 살다가 어려워 빌린 빚이 팔아 간 돌랭이로는 모자라 막살이마저 비워줘야 하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야 이 넓은 세상 밤이슬 피할 문간방쯤은 있겠지만 채권자 양반이 오는 봄까지 기한은 줬으니 할멈, 그나마 올겨울은 걱정이 없네 아들놈이야 다시 일어설 테니 걱정 마오 잘난 자식에게도 어려운 시기는 있는 법 한때는 할멈과 나도 힘든 고비 넘기며 살았잖소 수중에 있는 몇 푼은 ..

한줄 詩 2022.08.03

구석이 좋을 때 - 황현중 시집

숨어 있는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서점엘 가도 흔히 메이저라 불리는 시집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 위주로 진열이 된다. 당연 독자들 눈에는 이런 시집이 먼저 보일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무명 시인에게 눈길이 간다. 서점에서도 맨 앞자리에 있는 시집보다 모서리 한쪽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명 시집을 들춰보려고 노력한다. 이 시집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라는 제목 또한 마음에 든다. 나도 50대가 저물어 가면서 슬슬 구석이 좋아진다. 구석에 있어도 이렇게 향기를 품은 시집은 발견되기 마련이다. 시인의 약력을 보고 더욱 시에 몰입하게 되었다. 황현중은 시인은 청년 시절 학업을 중단하고 노가다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우체국에 들어가 30여 년을 근무했다. 2015년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문학..

네줄 冊 2022.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