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실업의 무게 - 서화성

마루안 2022. 7. 18. 22:04

 

 

실업의 무게 - 서화성

 

 

어제는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하늘에서 햇볕이 쏟아진 날

윤슬을 본 지 오래다

식탁의 거리는 급여일과 좁혀지지 않았으며

식탁에서 말의 간격보다 멀어져 있었다

며칠째 콩나물국과 말라버린 콩나물무침이 전부였고

김이 빠진 쉰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다

탈색이 된 회색 작업복은

일용의 본분을 다했는지 소금꽃이 피어 있었다

 

한때 통장 서너 개가 배불러 있던 시절,

하루걸러 밥 먹자던 사람은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 떠나기 시작했다

 

돌탑처럼 쌓여 있는 이빨 빠진 그릇들

꾸역꾸역 헛배에 두꺼운 벽지를 바르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에

오래된 빵집에서 허기가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해남부선을 타면 내가 두고 온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실어증을 앓는 사람처럼 바다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주절주절 말 못 할 사연이 썰물처럼 빠졌을지 모른다

성장통을 심하게 앓았던 오월은 진실이 앞서는 날이었고

그날은 말보다 사람이 앞서는 날이었고

 

계절이 가기 전에 속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믿었다

한때 말이 많은 국어 선생이 꿈이었다며

어제는 잃어버린 말이 한바닥이 늘어나 있었다

그날은 뼈마디가 드러난 손으로 안방을 훔치고 있었다

 

 

*시집/ 사랑이 가끔 나를 애인이라고 부른다/ 푸른사상

 

 

 

 

 

 

시소 - 서화성

 

 

한쪽으로 기울다가 다른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어

 

한쪽은 담장 넘어 노을을 볼 수 있었고

조금은 외로웠을 가을이 있었어

해가 떨어지고 남은 아쉬움은 말이야

 

방패연처럼 방향을 잃은 적이 있었지

밀린 일기를 쓰다가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운 날이 있었어

그날은 잠자리가 날아다니고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고

한쪽으로 가을이 담장 아래로 지고 있었어

 

메밀꽃이 필 무렵이었을 거야

울창해진 숲마저 계절이 바뀌면 새로 태어나기 마련이야

한때 팽팽했던 나이는 벼랑 끝에 있었지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어

해가 떨어지면 다른 해가 솟아오르거든

외롭던 가을이 지나면 타는 노을을 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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