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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감나무 아래에서 - 김애리샤 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르르 생겨난 감들 그중 작고 못난 감들을 밀어내는 나무 떨어진 감들은 감나무 아래 풀섶 어딘가에 떫은 피로 스스로의 상처를 덮는다 아홉 살 애란이가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는 일 이슬에 발이 다 젖도록 상처난 감들을 줍는 일 풋감 몇 알 주워 쌀독에 묻어 두면 상처에 새살 돋듯 주홍색으로 예쁘게 익어 가던 감 빨리 예뻐지라고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보면서 애란이도 말랑말랑 익어 갔다 이파리조차 많이 달지 못하는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풀섶을 뒤적인다 작은 상처들이 아물어 가며 달콤해진다는 것을 사십 년 전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각자 다른 곳에서 같은 계절들을 지나온 사이 제가 맺은 열매를 제가 버리며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늙..

한줄 詩 2022.07.28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 - 박판식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 - 박판식 25 곱하기 2에 빼기 2, 어린 아들은 무엇을 계산하는가 검은 장미, 하늘은 후퇴를 거듭하는 중이다 운이 다한 거북이가 바다로 돌아가는 길에 굶주린 자칼을 만난다 스물다섯 나이에 죽은 엄마를 만나러 쉰여덟 나이의 아들이 하늘나라로 가면 아빠 같은 아들과 딸 같은 엄마가 만나겠네 장구벌레들이 눈송이처럼 떠 있는 웅덩이를 엄마 하고 불러본다 나가려고 옷을 차려입었다가 다시 하나씩 벗고 발가숭이가 되어 중환자실의 외삼촌 자세로 누워본다 임신한 아내가 냉면을 찾는다 뱃속의 아이는 실컷 놀았다 제아무리 더하고 빼도 세상의 무게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나는 말한다 - 박판식 인생은 발걸음이 빠르다, 화요일에는 엉터리 ..

한줄 詩 2022.07.28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은유로서의 질병 - 이현승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적이 있지만, 그래서 실패의 기원으로 가서 기원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터미네이터-T1000의 일이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유감스럽게도 액체 금속이나 최첨단 나노 갑주도 없이 기껏 두부처럼 무른 살가죽만 걸치고 태어나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빨거나 쥐는 것, 먹고 싸고 울고 웃는 게 전부일 뿐이며 더욱이 우리에겐 기억이 없을 것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마땅히 되돌아온 이유를 모르는 우주 전사의 처지란 기실 우주 미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지만 코끝 벌름거리게 하는..

한줄 詩 2022.07.27

반성 - 편무석

반성 - 편무석 가을은 나의 발치 처음 슬픔이란 지병을 얻은 것도 내가 태어난 가을 겁도 없이 덤비다 꺾이고 찍혀 능청스레 붙잡아 둔 삭정이를 온몸에 박힌 옹이를 엄살로 갈고닦은 그늘은 편리하고 따뜻한 병상 몸이 뜨거워 주체하지 못한 나무가 분신(焚身)에 들 때 너무 크게 벌린 나의 입은 가을의 아궁이 울컥울컥 넘치는 핏빛 재를 받는다 흰 눈이 자랄 때까지 제 살 찢어 우는,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눈에 야위어 가는 흰 바람 *시집/나무의 귓속말이 떨어져 새들의 식사가 되었다/ 걷는사람 간월도 - 편무석 살아내지 못할 것 같던 날들이었지 고비마다 뛰어들던 달빛에 이별을 달려온 길은 기적이었어 건너를 향해 내민 손이 뒤틀린 나무는 오랜 시간 흔들려서야 물결의 상념을 키워 물결을 부르는 마음에 닻을 던진 서해..

한줄 詩 2022.07.27

허물을 통과하는 소란 - 최규환

허물을 통과하는 소란 - 최규환 어둠끼리 살을 맞대고 온전한 무엇에 기댈 때 온기를 품은 매미 소리는 누구의 허물을 받아내는 목청일까 아무도 없고 어느 누구도 있으면 안 되는 새벽 정거장 실개천을 뒷목에 감춘 섬뜰교 너머엔 고요가 남긴 슬픈 뒤태로 서성이다가 오늘에서야 내 눈에 들어찬 풍경을 펼쳐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몸이 뒤엉켜 목불좌상(木佛挫傷)의 염주를 꿰고 있던 매미는 우는 방향에 맞춰 허물이 깃든 내연의 짝을 이루고 있다 사랑에 실패한 울음이었다가 고비를 넘나드는 밤이 오고 한세상 떠메어 흐르다, 경계를 허물며 읊어대는 경전(經典)을 펼쳐놓은 것인데 슬픔도 한 밑천이라서 몸을 헹구는 적막으로 왔다가 다른 세상을 잇는 들끓는 소리로 죽음도 불사하고 빛나는 저, 바스러지는 소란 *시집/ 설명할 수 ..

한줄 詩 2022.07.26

막창집 - 김륭

막창집 - 김륭 영원, 이라는 말을 구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팔라진 숨들이 장례식장 화환처럼 묶인 곳, 내가 웃으면 바람이 따라 얼굴을 질겅거리며 들어설 것 같은, 여기서는 밤도 문상객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자연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어서 울음마저 질겨서 한 번 더 영원이 시작되는 곳. 여기는 소를 위한 모든 나라, 우리는 풀처럼 순하게 앉아 있고 코뚜레를 꿰기도 전에 달아난 사랑 또한 어느 구석진 자리에서 꼬깃꼬깃 입을 봉한 봉투를 들고 사람을 줍고 있는, 언제나 막다른 곳이다. 인생이란 입으로 뱉기 전에 뒤를 들키는 말이어서 웃는다. 빌어먹을, 다음 생이 있다면 이번 생은 살지도 않았을 것! 소가 웃는다. 발밑에 떨어진 숨을 동전처럼 주워 다시 핥는다. 그게 다 영원이란 말 때문에 그래. 소..

한줄 詩 2022.07.26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그 흔한 연고도 없이 - 이명선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나의 이야기로 나는 흥건한 바닥이 되었다 고시를 치를 생각 없이 고시원에 있었다 공직자처럼 공개할 재산이나 공제할 가족이 있었다면 고사했을 것이다 열대야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물수건을 올리고 느린 밤을 밝히듯 삶의 낱장을 뜯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면 엎드려 자다 목마른 얼굴로 일어났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언뜻 마주칠 수만 있었다면 흥건한 바닥에 배설된 우리가 떠다닌다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는 우리의 이야기는 작은 소란에도 불시에 솟구치려는 간헐천 같았다 두 평 남짓한 방에서 우리의 회고록을 쓴다면 공수래공수거라고 써야 할까 공공의 적이라 써야 할까 검은 마스크로 가린 칸칸의 방은 타 버린 낱..

한줄 詩 2022.07.23

종달새 - 이정록

종달새 - 이정록 ​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자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첨작 - 이정록 달밤에 지방을 태우고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

한줄 詩 2022.07.23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왼쪽 곁에 내가 왔습니다 - 김재덕 봄날 국수 한 그릇 먹고 굽은 느티 어깨 드리운 평상에 앉습니다. 꽃잎 몇 닢 날립니다. 담배 한 모금 낯선 손님처럼 사라지는데 왼쪽 곁에 누가 앉습니다. 어느 봄날 꽃비 내리던 서소문공원에서 세월 참 더럽게 안 간다 먼지 뽀얀 질경이한테 분풀이하던 젊은이군요. 발밑에는 그날 곁에 있었던 그녀 눈물 한 방울 제비꽃으로 피어 있는데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젊은이 날 두고 포로롱 혼자 날아갑니다. *시집/ 나는 왼쪽에서 비롯되었다/ 곰곰나루 개심사(開心寺) - 김재덕 서산 지나 해미 가는 길 늙은 작부 사타구니 같은 민둥산 헤집고 들어가면 가슴 환한 절집 하나, 개심사 있습니다. 키 큰 소나무들 내려다보는 검버섯 돌이끼 계단 오르다 보면 문득 내려다보는 천 년 기억..

한줄 詩 2022.07.22

줄넘기 - 조숙

줄넘기 - 조숙 그동안 만났던 줄을 넘는다 줄을 보고 따라갔다가 낯선 입구 앞에 덩그러니 남겨지던 경계를 두 손으로 잡고 넘는다 뒤통수를 맞거나 발목이 걸려 넘어져도 무릎 굽히며 줄을 넘는다 굽힐수록 다치지 않는다는 것 날지도 못하는 두 팔 날개인 듯 믿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시간은 가고 그렇게 삶의 근육이 커질 것이라고 믿으며 줄을 돌린다 바닥을 쳐봐야 살길이 보인다는 오래된 전설 줄을 만날 때마다 바닥을 딛고 날아올라야 하는 고단한 연속 줄넘기 어두워진 미끄럼틀 아래에서 줄넘기를 한다 *시집/ 문어의 사생활/ 연두출판사 흘수 - 조숙 내가 타고 가야할 미래는 올라타면 움찔한다 작은 바람에도 좌우로 흔들린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두려움, 가끔씩 튀어 오르는 호기심으로 마음 두근거리고, 멀리 지나가는 물결..

한줄 詩 202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