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가을 답변서 - 이서화

마루안 2020. 11. 22. 19:05

 

 

늦가을 답변서 - 이서화

 

 

살다 보면 참 답(答)은 모르겠고

변(辯)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말들로 가능한 것들이지만

답변은 어디선가 데려와야 하는 것들이다

늦가을 붉은 단풍나무 가지 뚝 분질러서

쓱쓱 쓰고 싶은 뜬금없는 답변서 작성

막막한 답변 한 장 쓰면서

가을비가 말아 올린 하늘을 보면

산 능선 위로 분리수거한 듯 떠있는 구름

빌딩 위에 떠있는 광고풍선은 뚱뚱한 바람을 넣고도 잘도 떠있다

사실인 것들의 대답은 늘 빠르고

어느 귀퉁이에서는 부정의 대답으로 들려오고

답변을 하기 위해

마른 혀끝을 궁리로 적시는 시간

질문은 안 보이고

답변의 말투는 중고딕 말투이다

 

쌀쌀해지는 날씨의 답변은 화려하게 피는 꽃이다

그의 생각은 쉼표가 없고

또 다른 답을 기다리는 사이

구름도 어느새 고딕체로 산등성이 넘어간다

답변을 뽑아낸 자리마다 잡풀들이 웃자라 있다

작은 풀 공을 만들어 멀리 차듯

답변서의 마침표들 공중을 가로질러 풀숲으로 든다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여행을 밀어 넣다 - 이서화

 

 

짧은 여행은 자칫 신발을 놓치기 쉽지

긴 여행은 꾹꾹 눌러 신고 빈 배낭의 설렘은

짐을 넣은 만큼 빠지는 것

이것 봐, 일정들의 빼곡한 양보를

때론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차곡차곡 서로 감싸는 것을

옷과 세면도구가 아닌 기후와 습도, 더위를 챙기고

미끄러운 날씨와 발등에 달라붙는

슬리퍼 자국 같은 독충들도 챙겨야 하지

 

문득 가방은 철없는 동지 같지

적정량의 무게를 웃도는 저 들뜨는 가방

일상의 그 뻔뻔했던 손잡이들과는 달리

날아갈 듯 날아가는 가방들

 

남은 주머니 하나쯤은 유사시 대처 목록이지

물에 빠진 신발, 굽이 불안한 신발

두고 온 걱정거리로 너덜거린다는 것,

몇 켤레의 일정이 다 닳거나 찢어지고 나면

 

그때부터 오르막으로의 여행이라는 것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기슭으로는 밀려오는 것들을 마주한다는 것

 

체류는 너무 가벼워져 다 동나고

시간은 어느새 기호들로 변하지

모자라던 주머니들 텅텅 비워지면

돌아가 풀어보는 배낭 안에는 작게 말아둔 냄새들만 있지

비닐봉지 안의 것들은 뜯어야 풀 수 있는 것들이어서

갈아입은 여행의 허물들이

기어이 쏟아지고 만다는 것

 

그래서 텅 빈다는 것

 

 

 

 

# 이서화 시인은 강원도 영월 출생으로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계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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