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을 끝에서 - 김상렬

마루안 2020. 11. 23. 19:30

 

 

노을 끝에서 - 김상렬


아름다운 날들이여, 이윽고 해가 진다.
하루가 가고 한 생애가 타버린 노을 끝에서
나는 비로소 그리운 고향 앞에 선다.
부르지 않아도 달려오는 저 황금 파도,
그대는 무슨 영혼의 채찍으로 나를 삼키려는가.

회돌이 치는 피의 격정, 거대한 주름살로
망각의 숲에 가려진 낯익은 길들을 일으키며
생명의 고리, 빛의 둥지로 나를 이끄는 노을은
노랗고 희푸르며 검붉은 영원회귀로 춤춘다.
끓는 수평선의 몸부림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사랑하는 날들이여, 서녘바람이 뜨겁다.
그 빛의 칼날을 물고 잔뜩 부풀어 오른 바다는
진정 거룩한 침묵, 눈부신 신(神)의 손짓,
밤으로 가는 진통은 왜 저리도 황홀한가.
심장 속 먼동이 터지는 내일 새벽까지
나는 이대로 잠들지 않는 그리움이고 싶다.

노을의 노을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시집/ 푸른 왕관/ 새숲

 

 

 

 

 


고독사 - 김상렬


사는 게 무겁다.
자기 몸피만큼이라도
가벼워지고 싶지만,
그는 그 무게를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무거운 막바지 인생을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이면 또 거짓말처럼
그마저 말짱 잊어먹는다.

그의 얼굴에 번진
마지막 웃음의 흔적,
인생은 저렇듯
혼자일 때 편안한 것인가.


 

 

*자서

내게서의 시는 즐거운 고통이다. 시를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뼈진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하다. 너무 당연한 명제일 수 있겠으나, 지나치게 쉽고 시류를 타는 듯한 작품은 아무래도 거북살스럽다. (중략) 나는 늘 고통을 즐겼고, 외로움을 사랑햇으며, 함부로 시를 내친 적이 없었다. 내게서의 시는 곧 종교와도 같은 구원의 손길이며, 우주와 소통하는 영혼의 속삭임이다. (중략) 시여, 일어나라. 그리고 저 부정 타고 불의한 것들을 단칼에 쳐부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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