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장 - 이돈형

마루안 2020. 11. 21. 19:53

 

 

파장 - 이돈형


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일로 고요한 상자처럼 남아 있다
쌓여 있는 물건을 거두며 스스로 허리를 꺾듯 서둘러 격려하듯 하루를 트럭 위에 싣는다
네게서 흩어진 저녁이 입을 오므린다

어디까지 왔니,
어디까지 왔니,

온종일 밀린 기분으로 걸음이 빨라지는 너는
사람들이 휘저어놓은 일렬횡대의 짧은 곡선을 휘잡아 일시에 내일로 보내는 너는

아득해도 파장

입에 물려 있던 벌판처럼 펼쳐놓았던 바닥을 쓸며 휩쓸려 가는 입을 식힌다

예감이 사라진 짐칸의 노끈처럼 '언제가'로 채워진 바닥은 영문도 모른 채 이쯤에서 어둠과 뒤섞이고

이동하는 저녁은 불빛이 없다
씻기듯 씻어내도 흔한 어둠과는 다투지 않는 사람처럼 시동을 걸고 있는 너는

어디까지 가니,
어디까지 가니,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걷는사람

 

 

 



의견 - 이돈형


죽음을 꿈꾼다는 말에 바른 생활을 핑계로 나온 거리는 모두가 유혹이 빠진 윤곽만 남아 있다

꿈꿔 본 적 있니,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말을 들었을 때 지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데

흔하게 다닌 길을 물었던 건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였다 지낼 힘 따윈 관심이 없었다

많은 것이 흔해서 길은 나를 모를 것이다 나도 나를 모르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오늘처럼 연약한 꿈을 꾼 날엔

길이 좁아질수록 끌리는 고립을 만끽하며 걸었다

너와 입 맞추면 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 마음의 일부를 씻게 된다면 한 번쯤 입을 맞춰 보고 싶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약일 수 있다지만 모르고 지내는 게 더 어려울 때가 있다

꿈이 투명했다면 당신은 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귓속을 파 달라고 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속삭임이 사라질 때까지

꿈꿔 본 적 있니,

그 말에 지나온 당신을 닮기 위해 입 맞출 때까지 속수무책이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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