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각자도생 - 박태건

마루안 2020. 11. 21. 19:35

 

 

각자도생 - 박태건


검은 옷을 입은 날이면
슬픈 소식이 먼저 온다

환절기에는 귀가가 늦고

사무실 문 앞의 김영혜 선생님은
이십 년째 같은 자리다

퇴근할 때 힐끗 보니 책상에 엎드려 있다
나는 봉투를 챙겨서 조용히 나온다

검은 옷의 주머니에는
수치심에 젖은 손이라든가

실연한 연인의 속눈썹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옷장 속의 검은 옷은
아무리 반듯하게 걸어 놓아도
어딘가 한쪽은 기울어 있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비닐봉투 - 박태건


그날이 오면 비닐봉투를 산다
비닐봉투에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니까
술과 말린 꽃과 그리고
행복했던 추억 몇 장,
술을 따라 놓고 생각에 잠기다
참, 술은 못 드시잖아!
그보다 나이가 많아진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그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떠올렸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질 때까지 이야기했다
그래도 남은 것은 비닐봉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와서
비닐봉투를 머리에 썼다 다행이야!
비닐봉투엔 언제든 넣을 수 있으니까
몸이 젖을수록, 머리가 뜨거워져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봉투가 있으므로 구겨진 채로
어디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아무것도 아니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검정 비닐봉투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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