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느티나무의 갱년기 - 박구경

마루안 2021. 1. 11. 21:52

 

 

느티나무의 갱년기 - 박구경


느티나무도 갱년기를 앓는다
자신의 그늘을 지붕 삼아 매일 거기 와 있는 젊은 농군의 트럭을 자식처럼 남편처럼 애지중지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하루는 감 농장에 감 실러 출발하는 것을 보고 아주 멀리 가는 줄 알고
괄괄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구불구불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슬픔의 뿌리는 맨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애타는 서글픔으로 뿌리를 깊게 질러 신고 그것을 끝까지 바라보느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빴다
이제는 없는, 이제는 멀리 떠나간 트럭
이별이야!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무침을 온몸으로 떨며 들판의 절명인
시선을 바꾸지 못한 채 한참을 굳어 있다가 고개 숙여 숨을 고르고 있었으니
그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소요마저
환청이다... 이 또한 내 맘이다... 하는 동안
헐레벌떡 등 뒤를 빠르게 다가와서는 싣고 온 노란 감상자를 마당 가득 부려놓는 먼지와 트럭이 또다시 느티나무의 충성스런 난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 와 등을 기대고 쉬는데도 배시시 웃거나 돌아보지도 못할 처지가 되어 버렸다
느티나무는 늙은 자신을 오래 산 황구나 부엌 문짝으로 비유하며 전신의 이파리를 파르르 떨며 바람이라고 바람이라고 세상이 다 붉고 노랗다고 능청거리기를
나도 이젠 늙었구나! 죽어야지... 연거퍼 중얼거리는 느티나무가 됐다
느티나무도 갱년기를 앓는다


*시집/ 외딴 저 집은 둥글다/ 실천문학사

 

 




외딴 저 집은 둥글다 - 박구경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온기를 저만치 떠나 마을 끝
밭두둑 밭고랑 비탈을 지나
달이 굴러 내린 듯
뒷산 솔잎을 누렇게 뒤집어쓰고 둥그렇게 적적한 지붕을 내려
오지 않으면 온데간데없다 하는 천지간 저 땅거미 속
누가 나왔다가 들어가긴 했는지 외딴집

보고 싶다 외롭다는 인간의 말들을
일러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저 집은 지금 스스로 달을 띄운다
달, 명징한 달




# 박구경 시인은 1956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8년 제1회 전국 공무원문예대전 시가 당선되어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진료소가 있는 풍경>, <기차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국수를 닮은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