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시성(定時性) - 홍지호

마루안 2021. 1. 12. 19:15

 

 

정시성(定時性) - 홍지호


커튼을 치면 어두워졌다

일고 보면
그건 슬픈 일이다

사고로 딸을 잃은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어린아이가 된 거 같다며 웃는 아저씨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진다는 생각이 스쳤고
죄책감을 느꼈다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별수없이 좋아하는 음식의 종류가 늘어나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해도
꽃들이 자꾸 피어날 시간이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행성을 생각했고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먼지는 언제나 떠다니고 있었어도

누군가의 커튼 사이로
빛이 통과하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의 행성에서는 떠다니지 못하는 기차
사람들이 가득했다

빈 좌석들과 상관없이

기차는 조금도 지연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모두
슬픈 일이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심호흡 - 홍지호


당연한 것들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감정적으로

소리가 빛보다 빨라지는 순간 같은
비명과 절규가
미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순간처럼

진리는 만장일치겠지
만장일치가 가능하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박수를 칠게

모든 지문이 다 사라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면서
이해하는 척하면서 만장일치를

우리보다
나와
너가 좋아
물 한 방울이 
더 좋아 최대한 흩어진 채로 우리는
뭉칠수록 위험해지니까 휩쓸거나
휩쓸리지 말자

아직도 홍수가 심판이라고 생각해?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물속에서는 비명을 지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물속에서는 비명을 목격했다는 비문이 가능해지잖아

간절하게 진리를 갈구하던 사람들이
거울을 보고 슬퍼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거울을 보다가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 지문이 생기면

눈이 마주쳤을 때 느낌을 오래 간직하리
라고 다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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