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 여태천

마루안 2021. 1. 11. 22:15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 여태천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밤중에 일어나 끝이 없는 통증에 대해 생각한다.

혼자 불 밝히고 있는 가로등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써 버렸다는 듯
잠시 거기 기대어 숨 돌리는 남자
자정이 넘은 골목길을 힘겨워한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 개가 짖는다.
무엇을 더 잃어버릴 수 있을까?

남자는 어디서 오는 길일까?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손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하얀 봉지에는
아이에게 줄 선물이 담겨 있을까?
바람이 그의 성긴 머리를 살짝 건드리나 보다.
그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있다는 것일까?
생각은 자다 일어나서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아픈 몸을 타고 흐르는 신경처럼
외로움의 밤은 멈추지 않는다.
무음으로 켜 둔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테러와 반격이 이어지고
그래도 이번 삶이 끝이 아니라는 듯이
손톱은 자라고 또 자라 생채기를 낼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경계에서 만들어지는 통증들
끝없이 가까워지기 위해
끝없이 멀어지는 것들
무엇을 더 잃어야 하는 것일까?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하는 일과 있는 것들 - 여태천


단 한 사람 앞에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
그 사람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것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고지서를 두고 가는 것

어쩌면 그는,
지는 해를 보고 영영 아침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에는 불을 켜지 않는 한 사람이 있을지도
어딘가에는 서성거리는 발소리로 저녁을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을지도
그럴지도,

설탕 가루처럼 노트에 흩어져 있는 문자들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스윙>, <국외자들>,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 등이 있다. 제2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