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잠 - 박윤우

마루안 2021. 2. 10. 21:48

 

 

잠 - 박윤우


2,500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창가 의자가 공짜
구름의 힘을 구경하는 것도 공짜, 눈 뜨고 조는 것도 공짜다

엄마는 나를 뱃속에 채우고 아홉 달 반을 뭉쳤다했다
덜 뭉친 나를 꺼내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동티나지마라! 느티나무에게 물 떠놓고 빌었다고

정한수와 수수팥떡의 효능일까 리필 받은 아메리카노가 묽어서일까 앉으면 존다
기다리는 너는 오지 않고

건너 유리창에 비치는 저 남자는 잠 좀 아는 남자, 막무가내 잠의 손잡이를 세 시간 째 움키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VOD스크린
한 편의 영화에는 몇 번의 키스신이 들어갈 수 있나? 몇 사람이 죽어나가야 끝이 나나? 키스타임은 이미 끝이 났고 죽을 사람 다 죽었는데 여태 의자를 업은 채 조는 남자

이런! 내가 저 남자였다니

입지 않을 옷이 더 많은 옷장 같은 내 잠, 사람들은 시계 방향으로 도는데 내 잠의 손잡이는 늘 역방향이다

너는 너로 바쁘고 나는 늘 내 잠으로 붐빈다

쿵쿵 들이받는 잠의 이마, 왜 깨우고 그래! 내가 나를 깨운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아주 멀고 긴 잠깐 - 박윤우


104동 꼭대기층 베란다에서 한 뼘쯤 바깥, 누가 공중에 떠 있다

누가 무슨 말을 꺼낼 때 있잖아..., 하다 잠깐 멈춘 입술모양처럼 누가 떠 있는 거다
잔디 깎던 인부들이 밥 먹으러 간 뒤여서 예초기가 잠시 멈춰 있었다

우그러졌던 공중이 쫙! 아래로 펴졌다
베란다에서 공중으로, 공중에서 바닥으로 주소를 말소하는 그
그는 몸으로 몸의 속도를 넘는 거였다

폴리스라인이 쳐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경찰이 베란다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알리바이가 불분명한 뷰파인더 속 베란다

저녁을 먹고 물소가죽 소파에 기대 리모컨을 누르자 땅바닥에 엎드렸던 흰 스프레이 테두리가 TV 화면에 납작하게 떠올랐다

미루고 있지만 결국은 죽을 사람, 죽음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사람들이 이미 죽어 더는 죽을 수 없는 사람에 관해 침을 튀겼다

채널을 돌리자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나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내가 왜 웃지? 생각하는데 누가 나를 탁! 닫는다

닫힌 채로 바라본 건너편 거기, 누가 또 떠 있다
아주 멀고 긴 잠깐,
아침 햇살에 갇혀 부유하는 식탁 위 먼지처럼

 

 

 

# 박윤우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했다. 2018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저 달, 발꿈치가 없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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