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착한 눈 메우기 - 윤유나

마루안 2021. 2. 8. 21:46

 

 


착한 눈 메우기 - 윤유나


저 자는 나를 키우기에 너무 고단해
나쁘지 않았어
저 자는 나를 돌보기에 너무 병들었어
나쁘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고서 나는 아팠어
낚시를 떠났어

내 입버릇이 결국 나를 떨궜나

저 자는 늙는 것에 중독되었던 거야
나쁘지는 않았어
저 자가 원하는 걸 알고 있었어
나쁘지는 않았어

산이 어째서 파랄까
섬에서 낚아 올린 물고기는 모조리 반 토막이 나 있었어
어째서 아가리와 꼬리를 놓고 나는 매번
피리 같은 리본을 선택할까

백합밭을 지나
토끼밭을 지나
나비밭을 지나

눈이 내린다
길고 험한 눈이
오늘도 마땅한 하인을 찾을 수가 없었어
무릇 믿음이 바로 이 자를 결딴내고 말 것이기에

내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온 후부터
나는 몽땅 추위에 떨고
샐러드를 먹다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시집/ 하얀 나비 철수/ 아침달

 

 




헤어진 순이 - 윤유나


있었다 친구 없는 철수가
생각할 만한 생각이 없고
말하고 싸우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철수가

샀다고 입을 수 있는 티 팬티가 아닌
소리쳐 부르면 '여기 있잖아' 읊조리는
같이 놀고 싶은 사람, 시시한 사람
철수가 있었다 한 사람만 사랑해야 되는 철수가

검은 양말을 신고
검은 모자를 쓰고
아로마 향이 통증인 날엔 철수를 달랜다
은단도 마찬가지니까 하염없이 철수를 달랜다

하얀 사람 빼곡히 들어선 하얀 집
하얀 기쁨
부스러기 흩날리는
하얀 나비 철수




*시인의 말

다 살아서야 집이 된 몸체를 나가는 길입니다
집이 조용해질 때까지 며칠 더 머물렀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어제는 입맛이 없어 먹지 않고
밤새 두둘겨 맞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랑이 하필 잠을 자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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