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복을 표절하다 - 이운진

마루안 2021. 2. 8. 21:56

 


행복을 표절하다 - 이운진


이제는 천사들도 우울한 시대
끊임없이 새로운 날개를 바꿔 보여 줘야 하는 시대에

고독과 부드럽게 사귀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떠돈다
여행자도 방랑자도 순례자도 아닌 모습으로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 떠돌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개와 고양이
똑같은 갈망
똑같은 멜랑콜리
아래

부탁보다 더 간절하고 외침보다 더 크며 그물보다 더 촘촘한 해시태그들
별처럼 반짝인다

세상 어디든
똑같이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하루

달과 꽃을 가지고도 완전히 행복하지 않을 때
이런 밤에는 외로움도 필요하다는 걸
나는 언제쯤 알게 될까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따뜻한 반어법 - 이운진


다음 해, 꽃이 피면
당신의 셔츠 당신의 벨트 당신의 구두를 잊을 거야
오래된 주소 즐겨 쓰던 형용사와 편지 속의 마침표를 꼭 잊을 거야
더 이상 당신을 감출 행간이 없으므로
눈동자를 잊고 눈물을 덮던 눈꺼풀을 잊어버리고 나면
당신이 사라지는 것과 기억이 사라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이 될까

잊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픈 기억들
어두운 꽃송이 아래서
잊고 또 잊으면
나의 하루는 터무니없이 행복해지고
나비들이 죽는 계절에는
꽃을 잊은 채
이별에도 희망을 걸 수 있게 될까

다음 해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돌아와 꽃이 피는 날
나는 어떻게 해야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할까, 천만다행으로

 

 

 

# 이운진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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