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방학 - 박은영

마루안 2022. 7. 30. 21:28

 

 

여름방학 - 박은영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 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구슬 - 박은영

 

 

구두를 신은 누나가

마당에 구멍을 만들고 간 장맛날이었다

금방 돌아온다며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 주고 갔는데
검은색을 띠며 깊어진 여름의 구멍,
잃어버린 구슬처럼

굴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휘어지는 놀이

여기가 어딘지 몰라
나는 사탕을 녹여 먹으며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검지를 튕기면

혜성의 꼬리가 눈앞을 긋고 지나갔다
생선 눈알을 빼 먹고 배꼽을 파며 놀아도

돌아오지 않는 오후

 

잃어버린 것은 찾지 못한 게 아니어서

구슬처럼 작아진 나는

오도카니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낮은 쪽으로 몸을 뉘는 비구름을 보면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더 잃어야 어른이 될까

 

구슬 너머의 마당은

우주만큼 아득하고 구멍처럼 깊어,

주머니 안의 구슬들이

구슬프도록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 박은영 시인은 2018년 <문화일보>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