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잃어버린 끈 - 김태형

마루안 2021. 3. 17. 21:58

 


잃어버린 끈 - 김태형


말 대신 가만히 손을 내밀던 할머니에게서 끈을 받아왔다
여러 개 가져와서 다 나눠 주고 하나만 남았다
어느 새 그것마저 어느 손목을 따라갔다
거듭 연결되어 그 끝이 없으니
매듭이란 성스러운 것이다
내가 나눠 준 끈은 지금쯤 남아 있을까
그게 영원이라고는 누구도 헤아리지 못해도
내 손목에서 풀려진 끈 하나
무엇엔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허공일지 모른다
저 어느 보이지 않는 암흑대 속의 별일지도

지구가 자전하는 동안
하나뿐인 심장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기운다
내 손목에서나 회오리치다가
또 다른 손목으로 건너간 마지막 끈
이전도 이후도 그 사이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으니
끊어져 잃어버린 끈이 되어서야 허공이 된다
그렇게 또 매듭이 이어지는 것일까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던 눈길로
어느 밤을 나는 건너가고만 있다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되어서
발목께 스치는 젖은 쑥 이파리로 돌아가서
골짜기에선 골짜기로
잔물결엔 잔물결로 손을 놓아주며 살아도
사람과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다 끊고야 말았다
끊어져 이어 주기에는 너무 먼 별들을
입가에 침버캐가 허옇게 눌어붙은 천치가 되어서나
붉은 먼지로 하늘이 없는 구름으로
가서는 영원이 되라고
한 가닥 놓아준다 허공을 하나 덧대어 본다


*시집/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문학수첩

 

 




창라 - 김태형


가다가도 굽이를 치기 마련이듯
길은 뻗어 올라왔다
길 아닌 곳조차도 누군가 지나왔다

소금가마니를 실었을까
잘 빻은 보릿가루를 짊어졌을까
눈이 크고 순한 짐승의 잔등에 짐을 싣고
설산을 넘어오던 오래된 길이
어딘가에 또 숨겨져 있었다

은가락지를 하나 만들기 위해
말린 살구 포대를 들고
깊은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 들어갔으리라
그 길에 살구꽃이 한창 흩날렸으리라
구불구불 했으리라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높은 하늘을 붙들고서야 내려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안개가 내려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시인의 말

 

의자에 앉으며 의자에 기대게 된다. 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엉덩이를 쭉 빼고 의자에 기대어 의자는 되지 못하고 나도 되지 못한 채 비스듬이 누워 있다. 하루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놓고 앉아 본다. 기대지 않게 된다. 잃어버린 정원에 앉아 있는 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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