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마루안 2021. 5. 5. 19:37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푸르스름한 수염으로 그가 왔다
이 땅의 청년으로 다시 오지 않을 듯이
사진 속에서만 햇빛 웃음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세상에서 살아왔지만
간혹 가래침을 맞는 영상이 뜨기도 했다
멱살 잡히는 장면은 뉴스감이 되지도 못했다
암청색 바탕화면에 검은 형상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침은 그런 것이다
주검으로 정지되었던 사물들이 창을 내고 빛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런 영상은 매일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죽어가는 오늘 아침은 
내일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단단한 사각 틀 안에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화면 밖에서는 목련이 핀다는 봄의 말이 말이 들리지만
발인의 국화 향기가 줄을 서는 아침이다
꽃잎은 빳빳하지만 이 흰 꽃들에게 정규직이라는 꽃말은 없다
웃음이 정지된 사진으로는 싸한 아침 냉기를 데우지도 못한다
어두운 갱의 일터로 수그리고 들어갔던 청년의 어젯밤은 이제 기록이 되었고
어제의 아침은 오늘 아침보다 하루 먼저 죽었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선화여인숙 - 천수호


좁디좁은 방에
모처럼 더벅머리를 짧게 깎은
막노동꾼 서동(薯童) 군(君)이 드러누워
철대문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구릿빛 물탱크엔 눈금을 알 수 없는 물이
호스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
작은 네온등은 어느새 대문을 훌쩍 올라탔다
고동색 철대문이 거북 등딱지 무늬를 일으키고
바람은 호랑가시나무를 한 바퀴 돌았다
은밀한 서동 설화를 지켜준
검은 개의 혓바닥은 늘어져서 노을에 뒤섞이고
여인숙 철문은 여전히 삐거덕거렸다
잠깐의 기행이 한 통의 편지를 쓸 동안
소도시 밀양은 아직 선화를 기다린다
어떤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 겹겹산을 넘어 황금을 옮길 수 있는
선화는 언제 오려나
수많은 그녀들이 마동이와 다녀간 흔적은
이부자리에 녹물로 번지는데
선화가 오기는 오려는가


 


# 천수호 시인은 1964년 경북 경산 출생으로 명지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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