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마루안 2021. 6. 9. 21:38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허청허청 문상 다녀오셔서
큰 마루에 대자로 누우시던 조부님
양은 주전자 들고 불알도 덜 영근 내가
밭둑길 걸어 퍼 나르던 조부님 막걸리
연고도 없는 저승에서는 누가
나 대신 술심부름 할까

옛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몇몇 우화들을 함께 넣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이를테면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
이를테면,
십수 년 만에 돌아 온 큰누나의 분 냄새
같은 것, 낯선 사내에게 '매형'이라고
처음 불러보던 이상한 기표(記表)
한 번도 주인공인 적 없었던 풍경 속에서
나를 빼내 온다
내가 없는 풍경 속에서
도화(桃花) 진다 할아버지 돌아가신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부고 - 피재현


문상 가서 허기를 용서하는 데
오래 걸렸다
고인이 된 사람을 만나고
상주를 위로하는 일이
참 고단한 일이구나
이만한 허기를 느끼게 하다니
그 밥 맛있게 먹는 나를 용서하는데
좀 더 오래 걸렸다
허기와 슬픔이 서로를 먹어 치우며
슬픔도 줄이고 허기도 줄이는구나
주검을 눕혀놓고 돌아앉은 밥상이
맛있어도 되다니

삶은, 잦은 죽음과 직면하며 누구라도
죽음에 줄 서는 일
이 죽음에서 저 죽음으로 길을 내며
나의 부고를 전하러 가는
먼 길
가까운 길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 - 이규리  (0) 2021.06.11
지구로 달려온 떨림 - 김익진  (0) 2021.06.10
타인의 삶 - 오두섭  (0) 2021.06.08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0) 2021.06.07
안개의 취향 - 정선희  (0) 2021.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