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타인의 삶 - 오두섭

마루안 2021. 6. 8. 21:38

 

 

타인의 삶 - 오두섭

 

 

불 꺼진 날이 왜 많은지, 알려고 하지 않은 창가의 밤

 

서쪽 외벽을 타고 온 해가 모서리로 떨어지면서 짙은 그림자를 남기며

나뭇가지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는 그때

 

저 창이 오늘은 왜 열려 있는지, 어쩌다가 무심코 열려서

나와 눈이 마주칠 뻔한 풍경의 계단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

 

혼자 레몬 즙을 짜고 있거나,

시집의 한 쪽을 반복해서 읽고 있거나,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거나,

남자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을지도,

둘이 함께할 날들에 관해 심각한 담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도,

갑자기 외출을 서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내 화풍은 사실화에 닮아 있지만 도대체 옷을 벗지 않는 피사체들

 

힐끗 눈 흘겨보는 그이의 우편함

희미한 불빛에 묻어 나오는 정체 모를 소리들

아주 조금 열려져서 비밀스러운 그림자의 몸짓들

도무지 궁금한 무대 뒤쪽의 대사들

 

빈집 녹슨 문을 삐거덕 밀어보는 낯선 손등처럼

 

창을 열어젖히면 죄다 사라질 그 외로움 쪽으로 몸을 한두 번 내민 적이 있을,

먼 창 안의 삶

 

 

*시집/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문학의전당

 

 

 

 

 

 

포커페이스는 없다 - 오두섭

 

 

목격자의 눈길이 스쳐간

인상착의 하나를 그리고자 한다면

첫인상은 무시해버릴 것

 

첫눈에 반해버렸다는 사랑 이야기 따위는

 

목 없는 조각상 앞에 서 있는

내 얼굴은 어쩌면

오랜 세월 닳아버린 박물관의 청동거울이

흐릿하게 비추는 초상화와 견주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반쯤 감긴 눈 위에

일그러진 눈썹을 갖다 붙일 때는

불안하게 굴러다니는 두 눈동자는 외면해도 좋으리

 

양쪽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싱거운 눈물의 계곡까지도

다만 포커페이스가 지나간 흔적은 찾으려 말 것

 

내 미간에 의뭉스럽게 파인 도랑도

여기저기 흉터로 박혀 있는

크고 작은 사건도

들추려고 애쓰지 말 것

 

내 얼굴은 어쩌면

가마에서 막 꺼내져 식어가고 있는 잘못 구워진 도자기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붉게 타오르는 안색도

언젠간 숯덩이로 사그라질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