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후회 - 박주하
꽃을 사랑한다면
끔찍한 마음은 그 꽃 밑에 누워야 할 일
그러나 이미 살구꽃 핀
저녁들을 후회하던 참,
골목마다 헐값으로 꿈을 밀어 넣고 나자
모든 것이 사소하고 충분했으며
비에 젖을수록 맨발이 딱딱해진다
위로는 습관이기에
슬그머니 손을 놓고 돌아서지만
물 깊어 건너지 못하는 다리는
결코 당신의 불운이 아니다
마음을 다쳐 몸 안에 갇혔으니
입 벌린 고요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캄캄하고 작아진 마음들이 밀려드는 저녁
어둠을 핑계 삼아 질기게 불안을 껴안으니
불행을 너무 쉽게 불태우고 난 기분,
소리 없이 혼자 뜨거워진 심장을 버리고
흰 새가 떠나간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불가피한 저녁 - 박주하
변심의 기미를 읽고 울컥 몸이 상해 버렸지
절반의 슬픔과 절반의 광기가
입던 옷을 팽개치듯 시절을 걷어치웠어
너덜해진 마음 한 잎 챙겨 들고 서쪽으로 달렸지
묻지 못한 말들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지
타는 바퀴 냄새를 맡으며 마침내 진입하는 그곳에서
내비게이션의 긴박한 경고음이 들렸지
-도로가 좁아지는 구간입니다
어둠의 지형으로 들어섰으니 마음을
-주의하세요
고독에 소스라치게 놀라겠지만 삶이란 본래
-사고 다발 지역입니다
준비 없이 마음을 비워야 하는 구간은 계속될 테니
-규정 속도로 운전하세요
불행을 만나고 불행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피한 저녁은 반복되는 것
닳아 버린 인연을 의심하지 말라고
영혼 없는 기계가 맹렬하게 나를 다그쳤지
# 박주하 시인은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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