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마루안 2021. 6. 12. 21:18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보도블록을 걷다가 엊그제 구두를 밟고 지나간 말라뮤트가 생각나서

괜히 울컥할 때가 있다

욕봤다 왜 하필

전봇대를 차 본다 있는 힘껏 디딤 발을 딛고 없는 힘껏 공을

상상한다

파리의 한옥과 도시의 몰락

가지 말자고 하면 가지 않았을 텐데

못 간다고 하면 너네들 죽여 패서라도 가야겠다는

태생의 객기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했던가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때 그리고 부조리가 끝난 후에

가시나를 위하여 바친 러브송은 몇 명의 귓밥을 휘둘렀는가

그 노래방 그 단칸방과 그 냉장고 그 매실과 그 목마름

밤과 달빛에 비치는 그이의 목젖

습관처럼 헤어져도 버릇이 들어 왕래하게 되는 이성의 항구

나는 많이도 버렸다

인사는 각별하게 하지만요 둘이 있으면 이별할 것 같은 사람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수십 개의 단톡과 잦은 모임

상하관계 상관없이

우리 친해요 말하지만 나는 아닌데요, 라고 자위하는 관계의 굴레 같은 것

어느 날 또는 매일 혼자 앉아

미래를 위하여 손 편지를 쓴다

쓱 쓱 싹 싹

사람들은 각자의 예지력으로 날개를 펼치고 부리를 벌린다

재는 시발년이 아니라 시발놈이구나

틀렸다 이건 비보야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숨기고 구두를 닦는 거라고

 

 

*시집/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문학의전당

 

 

 

 

 

 

너는 연민의 힘 - 정경훈

 

 

다리가 부서지는 사람이 지구를 차려고 한다

 

열렬해지면 주전자에서 김이 빠진다 부엌이 소란스러워지면 그의 마음 또한 수군거린다 그는 너무 메말라 금방이고 비약할 것만 같다 그는 너무 길어서 반 토막이 되어 단명할 거 같다 그는 너무 대단해서 모조리 파생되는 사람으로 기억될 거 같다 내 둔전이 그에게로 향하면 나는 그의 종아리가 되어 결사를 두둔한다 그는 참 젊고 결코 강건하지 않아서 나를 대여해 주고 싶고 기꺼이 반납을 거부할 수도 있겠다 그의 하와이안 조명 덕에 가난한 밤의 거실에서 부유한 낮의 왕실로 당도할 수 있었다

 

성립되지 않는 연민도 나의 힘이다

 

 

 

 

 

*시인의 말

 

응, 그래도 내일은 오더라

 

세상이 더럽기 짝이 없어도

우리의 얼굴을 바라봐 주자

아름답고 우아하면 된 거라고

마음을 이어 잡아보자

 

마음속 작고 깊은 숲에 이른 내 친구들에게 고마워

이곳에서 살다 어제처럼 떠난 사람들에게도 고마워

자꾸 말하면 닳겠지만 진심은 닳지 않는다

 

언젠가는 닿을 거라 믿으며,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