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기형도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 한줄 詩 2015.05.10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 한줄 詩 2015.05.07
너에게 - 서정춘 너에게 - 서정춘 -여하시편 애인아 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 새빨간 거짓말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 우리가 오래 전에 똑 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 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 똑 같은 물이고 흙이었을 때 우리 서로 옷 벗은 알몸으로 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였겠느랴 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 다시 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 우리 여기서부터 빨리 빨리 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 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녁이 허물없이 우리를 녹여 버릴 테니 *시집, 죽편, 시와시학사 接石 - 서정춘 내 눈부신 젊은 날은 고욤나무 생감만큼 떫었더니라 자그마치 나이 들고 섬뜩섬뜩 겁질도 잦아지면서 나이 든 저승 나비 허깨비도 더러 보았지만 淸川里 강물 앞 돌밭나루 큰 돌 앞에 눈인.. 한줄 詩 2015.04.25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 한줄 詩 2015.03.25
어머니의 물감 - 원무현 어머니의 물감 - 원무현 막내에게 젖을 빼앗긴 젊은 아버지가 헛기침으로 별만 더듬다가 잠들게 한 그런 화려한 시절도 있지 않으셨냐며 어머니 없는 가슴을 씻어드릴라치면 아서라 아서 수줍음을 가리는 손사래 사이로 마른 호박잎처럼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몸에 간직한 그림 몇 장, .. 한줄 詩 2015.03.21
공중 묘지 - 성윤석 공중 묘지 3 - 성윤석 서울에서 행려로 죽으면 대부분 정 씨에게로 간다. 한 달 만에 발견된 주검이나, 노숙의 끔찍한 상처, 미혼모가 버리고 간 쓰레기통 속의 아이들 우리가 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날 자살했으나 뒤늦게 발견된 미인의 얼굴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 한줄 詩 2015.03.08
마침내 다다른 경지 - 주종한 마침내 다다른 경지 - 주종한 사람이 사람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너무 좋아 사람을 그냥 돕는 것이 이제야 뒤늦은 만학의 감회이거나 빙빙 도는 잠언의 경지 떼돈을 벌거나, 뭔가 기념비적인 선례를 남기거나 남들을 잘 웃기거나, 유별나게 잘났거나 남들의 비위를 잘 맞추거나, .. 한줄 詩 2015.03.05
늙은 연둣빛, 터널 - 박연준 늙은 연둣빛, 터널 - 박연준 어느날 밤, 내가 침대 끝자락에 매달려 쏟아지는 피처럼 녹고 있었을 때 딱지 아래서 울고 있을 싱싱한 상처와 미라처럼 죽음으로 꽃피울 아침과 마침표 위로 서툴게 떨어지는 말, 뒤늦게 대가리를 박으며 흐느끼는 말들과 다만, 엮이고 싶었다 거미의 가느다.. 한줄 詩 2015.03.05
공휴일 - 김사인 공휴일 -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 한줄 詩 2015.03.05
화분 - 이승희 화분 - 이승희 늙은 토마토는 자라는 것을 멈추고 좀처럼 늙지 않았다 나 이제 늙어서 더 늙을 게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사각의 흰 스치로폼이 거품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입니다 어두워지길 기다려 뱀처럼 고개를 쳐든 버섯들 그네 타는 아이의 흰 발목처럼 귀두를 쑤욱 내밀며 토마토의 .. 한줄 詩 2015.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