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마루안 2015. 5. 7. 20:54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여행자 - 장석주
 


산성비 내리치네, 바람 부는 저녁
노점상들 모두 판을 거두고
광장에 맨드라미처럼 붉은 발목 내놓고 뛰놀던
아이들 제 집으로 돌아간 뒤
산성의 더러운 빗방울들만
알전구 불빛 아래로 몰리네


구름 밖 교회보다 더 먼 곳에서 돌아온
이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여행자
옷깃에 아교처럼 달라붙어 펄럭이는 슬픔
등 뒤에 캄캄한 문명을 그림자로 드리우고
박쥐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걸어가네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추운 몸으로 너를 안는다
아궁이에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만다라 불꽃이 피어날 때
눈빛에 광채 서린 사생아라도 하나 낳자


여자는 밤새도록 늑골 밑에서 자라는
잎사귀를 똑, 똑 따내리며 슬픈 노래를 하네
손톱에 뜬 초승달마저 바랜 새벽
얼굴에 그린 눈썹 지우며 우네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아득히 흔들리고
들길 너머 진흙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하네
고달픈 세월 건너느라 이끼 돋은 몸 속에서
여자는 새를 꺼내 건네주네

 


*장석주 시집, 크고 헐렁한 바지,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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