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은 간다 - 기형도

마루안 2015. 5. 10. 22:23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장미빛 인생 - 기형도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강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20년이 훨씬 지난 까마득한 오래전 내가 그의 시집을 처음 펼쳤을 때 그는 이 세상에 없었다. 늘 어긋나고 한 박자씩 늦었던 내 인생에서 20대는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나의 20대를 암울하게 했을까. 그의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른 어느 봄날 새벽녘,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 어둡고 쓸쓸한 시도 좋았지만 이런 시를 남기고 스물 아홉에 요절한 그의 죽음에서 나는 전율했다. 삶이란 살아지는 것일까 사라지는 것일까. 봄인가 싶더니 어느덧 꽃지는 봄날이 한없이 아쉬운 요즘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문사한 봄날은 떠돌고 - 김왕노  (0) 2015.05.17
운수 좋은 날 - 김승강  (0) 2015.05.11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0) 2015.05.07
너에게 - 서정춘  (0) 2015.04.25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0) 201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