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머니의 물감 - 원무현

마루안 2015. 3. 21. 21:15


 

어머니의 물감 - 원무현



막내에게 젖을 빼앗긴 젊은 아버지가
헛기침으로 별만 더듬다가 잠들게 한
그런 화려한 시절도 있지 않으셨냐며
어머니 없는 가슴을 씻어드릴라치면
아서라 아서 수줍음을 가리는 손사래 사이로
마른 호박잎처럼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몸에 간직한
그림 몇 장,
마른 호박잎처럼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몸에 간직한
내 소년기 유년기 신생아기


어느 곳 어느 순간에든 어머니가 곁에 있는
나의 성장기모습은 어머니가 젊음을 짜내어 그린 것이다


아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는 어머니여
그러나 당신의 물감은
몇 만 년이 지났어도 지워지지 않는
알타미라동굴에 칠해진 짐승의 피보다 진하다



*시집, 홍어, 한국문연








검은 꽃 피는 나무 - 원무현



우물물 퍼 어머니 여름밤 무더위를 씻어드립니다
손등과 어깨선 가득 엎드려 있던 꽃이 달빛 아래 까맣게 피어납니다


이승에서 저승의 꽃을 피운 나무가
칠십 년 세월 구석구석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의 악력(握力)을 말합니다
"얘야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꽃을 피워낼 게다
논밭을 일구며 무꽃 배추꽃 다섯 마지기 가득 벼꽃도 피워 봤지만
내 몸에 피는 이 검은 꽃만큼 곱지는 않단다
네 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에 시들지 않을 꽃은 오직 이 꽃뿐이란다"


나무여,
당신 가지에 열리던 눈물과 웃음을
따먹은 자리마다 핀 것이 저승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마는
야윈 어깨에 떨어지는 눈물,
이승을 밝히는 불꽃은 뜨겁고도 뜨거워
이 검은 꽃, 한 송이라도 태웠으면 좋으련만
여름밤 무더위가 우물을 다 비워도 식지 않을 듯 합니다





# 가슴이 턱 막혀 오는 시다. 어머니란 단어에 눈물부터 앞서고 죄스러움이 많은 사람이라 더 그렇다. 이런 시를 읽을 때면 시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신춘문예 출신이 아니어도 문학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독자와 호흡할 수 있는 시, 시인이 얼마나 시를 즐기면서 썼는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몇 편의 시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는 시 쓰기를 멈춘 사람이 있는데 과거에 유명 시인이었으면 무얼 하겠는가. 20년 전에 시인이었어도 장농 속에 갇혀 독자들이 읽을 수 없는 시는 세상에 없는 시다. 자고로 시인은 과거의 화려한 수상 이력이 아니라 현재 발표하는 시가 좋고 시 잘 쓰면 대우해줘야 한다. 나는 지금 읽을 수 있는 이런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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