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시집, 내가 원..

한줄 詩 2016.05.22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가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

한줄 詩 2016.05.12